SOCIETY

이 별에 필요한, 우리가 필요했던 애니메이션

화성과 지구를 가로지르는 응원의 말, 한지원 감독이 기어코 그려낸 세계.

프로필 by 이마루 2025.06.01

한지원

1989년 생. 한예종 애니과 재학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으며 단편 <마법이 돌아오는 날의 바다>(2022)로 선댄스영화제 등 해외 영화제 러브콜을 받았다. <이 별에 필요한>은 단편영화와 웹툰, 광고, 시리즈물 등 형태를 가리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꾸준히 그려온 그의 첫 장편으로 넷플릭스 코리아가 선보이는 첫 애니메이션이다. 김태리, 홍경, 두 배우가 녹음과 액팅에 참여해 화제를 모았다.


블랙 리나일론 원피스와 슈즈는 모두 Prada.

블랙 리나일론 원피스와 슈즈는 모두 Prada.

<이 별에 필요한>이 5월 30일 드디어 공개된다. 감독으로서 입봉작 개봉을 앞둔 기분은

포스터와 티저가 공개된 후 주변의 연락을 받으며 비로소 실감하고 있다. 진심 어린 축하 연락이 대부분이다. 우리 ‘장르’에서는 정말 경사스러운 일이기도 해서(웃음).


넷플릭스 코리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이 제작되고, 그 감독이 한지원이라는 걸 알았을 때 ‘역시’ 싶었다. 그만큼 기대주로서 꾸준히 활약해 왔다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짧은 텀을 제외하면 ‘그러데이션’으로 계속 작업하다 보니 나이에 비해 작품 수가 많긴 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이야기가 온전히 이어지는 장편은 나도 처음이다. 장편을 만드는 것이 내 꿈이기에 이제 시작하는 느낌도 든다. 심지어 이렇게 전 세계에 공개될 예정이라니!


애니메이션에 참여했던 카카오 웹드라마 <아만자>(2020), 총 7화로 ‘라프텔’에 공개된 이후 극장 개봉까지 이어진 <그 여름>(2021) 등 여러 플랫폼을 통해 관객과 만났다. 그럼에도 더 넓은 관객 층에 대한 갈증도 있었는지

애니메이션, 그중에서도 2D 애니메이션은 노동집약적 작업이다. 한 번 만든 작품이 많은 사람에게 보여지길 바라는 마음이 있을 수밖에. 특히 장편 애니메이션의 경우 극장 개봉을 위해 유·아동용으로 타깃을 바꾸는 등 상업적 포맷을 고려해야 할 때가 있는데, 넷플릭스와는 겨냥하고 있던 관객 층도 일치했다.


제작사인 클라이맥스 스튜디오는 <방법><D.P><지옥><기생수: 더 그레이> 등을 제작한 젊고 감각 있는 제작사다

예전에 작업한 짧은 뮤직비디오 애니메이션이 시작이었다. 우주인이 등장하는데, 그 감성을 살려보자는 클라이맥스의 제안에 따라 기획 초기 단계부터 함께했다. 그 감성을 토대로 시나리오를 써 내려 갔고, 강현주 작가와 공동 작업으로 발전했다.


단편의 경우 스토리부터 원화 작업까지 혼자 하는 것으로 안다. 1시간 30분 넘는 분량의 상업 애니메이션을 탄생시키는 공동 작업을, 감독으로서 해내는 과정은 어땠나

내가 충분히 이입할 수 있는 감정선이 갖춰져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이건 나만 할 수 있어!’가 아니라 그래도 내가 이 감정에 대해 잘 알아서, 이걸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설명하고 주도할 수 있어야 한달까. 다행히 모든 협업 파트의 구성원들이 내 이야기를 잘 이해해 줬고, 때때로 내 기준이 흐려질 때면 “전에는 이렇게 이야기했었다”며 오히려 상기시켜 주기도 했다. 협업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는데 오히려 함께하는 사람들이 내 안전망이 될 수 있다는 걸 배운 과정이었다.


<이 별에 필요한>은 2050년 근미래 서울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랑 이야기로 화성으로 가는 게 꿈인 우주인 난영(김태리)과 뮤지션이자 레트로 음향 기기를 수리하는 제이(홍경)가 주인공이다. 여성 SF 작가들의 소설이 꾸준히 사랑 받는 요즘, 사람들에게 이런 설정이 한결 친근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싶더라. 전작 <그 여름> 또한 최은영 소설가의 단편을 토대로 했는데 동시대 창작물을 다양하게 보는 편인가

창작물 하나하나에 영향을 받는다기보다 분위기랄까, 소위 흐름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창작자라면 이야기적으로 성장하는 챕터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내 안에서는 <마법이 돌아온 날의 바다> <그 여름> 그리고 <이 별에 필요한>까지가 한 챕터로 느껴진다. ‘내가 여성으로서 이런 존재구나, 사회에서 이렇게 기능하고, 이런 역할과 영향을 주고받는구나’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살다가 20대 후반과 30대 초중반을 거치며 달라진 사회문화적 분위기에서 덩달아 나를 돌아보게 된 시기가 있었다.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장편 애니메이션 감독이라는 꿈을 이뤄준 이 작품의 처음 완성본을 봤을 때의 소감은

처음부터 끝까지 돌려보는 과정이 중간중간 워낙 많았다. 그래도 비로소 ‘완성된 걸 봤구나’ 하는 감정이 들었던 건 사운드가 처음 입혀졌을 때인 것 같다. 그림만 볼 때는 뭘 잘못 그렸고, 뭐를 고쳐야 하는지만 보였는데 목소리와 사운드 이펙트 같은 요소가 들어오니까 보이는 것들이 좀 달라지기도 하고, 처음으로 완성에 가까워진 기분이 들더라.


사운드 이야기가 나왔지만 주인공 제이가 뮤지션인 만큼 음악이 중요한 요소일 수밖에 없다. CIFIKA, wave to earth, 존박 같은 뮤지션은 물론이고 김태리와 홍경, 두 배우가 가창에 참여했다. 영화든, 애니메이션이든 음악은 ‘양날의 검’인데 이에 대한 부담은 없었나

내 작품 속에서 음악은 늘 중요한 요소였다. 작품을 거듭하면서 곡을 고르는 나름의 결이 좀 형성된 것 같은데 이런 면을 잘 이해해 주는, 정서적인 부분이 닮은 음악감독을 만나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더구나 남자 주인공이 뮤지션인 애니메이션의 테마곡이라면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끝나고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나. 이 부담스러운 과제를 해낼 수 있도록 가창곡에 대한 이해도나 감각까지 있는 분이면 더할 나위 없겠다고 생각했고, 다행히 박성준 음악감독을 만났다.


이야기를 내가 완전히 공감해야 하는 것처럼 음악도 ‘결’이 맞아야 했군. 감독으로 타고났나 보다(웃음)

모든 작업 과정을 통틀어 음악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많이 ‘말’한 것 같다. 작화는 내가 말로 설명하다가 도저히 안되면 직접 그리거나 만들어서 설명할 수 있는데 음악은 실제로 내가 만들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지 않나. 미래가 배경인데 또 너무 미래적인 건 안 되고, 일렉트로니카나 신스 팝 느낌도 있지만 갑자기 또 재즈 음악이 흐르는 아날로그적 감성이 등장해야 하는 것도 아우를 수 있는(웃음)….


음악을 활용하는 방식도 그렇지만 주인공들의 스타일링이나 배경으로 등장하는 실제 공간 등 비주얼 면에서도 동시대적 감각이 느껴진다. 한국에서 ‘애니메이션’ 하면 서브 컬처 중에서도 더 마이너하다는 편견이 있는데

다들 그렇겠지만 가까운 사람들과 소구하는 문화 콘텐츠들을 통해 서로 영향을 많이 주고받는 편이다. 실험적인 것과 상업적인 것, 이 양극단에 열려 있는 이들이다. 그런 한편 새로운 것, 동시대적인 것을 작품에 넣으려는 내 성향도 분명 있다. 애니메이션이라고 해서 굳이 내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자연스러운 요소를 배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요즘은 콘텐츠를 소비하려고 들면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 아닌가. 음악도, 영상도, 이미지도 하나를 보기 시작하면 그와 연관된 것들이 계속 흘러 들어온다. 작업을 할 때는 그런 정보 과잉 상태를 지양하려는 편이다.


인터뷰 전 미리 보내 준 러프 스케치들을 보니 한강, 성수동 편집 숍, 을지로의 음반 가게 같은 배경이 자연스럽게 등장하더라

상상력을 통해 굉장히 다른 미래를 보여줄 수도 있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너무 이질적인 미래를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지금 25년 전을 생각해 보면 고작 2000년도 아닌가. 건축 잡지나 패션 브랜드들이 제시한 미래의 이미지를 참고하면서 공감할 수 있는 미래를 만들고 싶었다.


작업 과정 중 가장 즐거웠던 부분은

솔직히 모든 과정이 즐겁고 동시에 너무 괴로웠다(웃음). 그래도 가장 재미있는 순간은 액팅이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 캐릭터가 움직일 때 이 인물이 진짜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통쾌한 기분이 든다.


원작이 없다는 것, 성인 애니메이션이라는 것, 2D 토대라는 점에 덧붙여 또 특별한 지점은 실제 배우가 애니메이팅 과정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김태리 배우는 최근 <엘르> 인터뷰에서 전문 성우가 아닌 본인이 난영을 연기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으나 감독님의 설득이 결정을 내리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 바 있다

뿌듯하다(웃음). 맞다. 배우들의 연기나 동선을 참고하는 실사 촬영을 진행했다. 사실 실사 영상이 애니메이팅의 레퍼런스로 사용되는 것은 디즈니나 픽사 같은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에서는 매우 익숙한 시도다. 몇 년 전 넷플릭스 1위를 차지한 애니메이션 <아케인> 같은 작품도 실제 액팅 영상을 참고하는 과정을 거쳤다. 훌륭한 배우들과 함께하니까 그들의 섬세하고 폭발적인 연기력을 담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더라. 연기 전문가가 아닌 내가 애니메이팅을 상상하기보다 배우들의 액션을 참고하는 편이 무조건 더 좋은 결정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많은 창작자들이 꾸준히 결과물을 내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작업에 대한 피드백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지원에게 그런 순간은 없었나

비슷한 질문을 받은 적 있다. 그런데 나는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그래서 결국 내가 하고 싶었던 게 흐지부지 세상에 없는 것처럼 되는 게 가장 무섭다. 조마조마하면서 내것을 세상에 꺼내놓고 또 그게 받아들여질 때 느껴지는 쾌감이 있다. 사람들에게 수용되는 감각이 내게는 정말 중요한 에너지다.


할머니께서 큰 만화방을 운영했고, 지금 일러스트레이터 람한(Ram Han)으로 활동하는 쌍둥이 언니와는 한예종 애니과에 같이 진학했다. 어떻게 보면 ‘만화 금수저’ 집안이다

만화방집 손녀라는 건 정말 자랑스러운 나의 유산이다(웃음). 언니와는 중학교 입학 전까지는 네이버 아이디도 같이 쓸 정도로 자아가 분리되지 않은 관계였다. 지난해 개봉한 애니메이션 <룩 백>의 두 주인공이 유년 시절에 같이 그림을 그리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 자매와 너무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난다.


만화 금수저가 ‘최고’로 꼽는 장편 애니메이션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그리고 짱구 극장판이다. 잘 알려진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어른 제국의 역습>뿐 아니라 작품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잡은,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작들이 많다.


예상보다 대중 취향인 걸(웃음). 산업에 관한 질문도 하고 싶다. 올해 로커스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퇴마록>이 관객 50만 명을 동원했고, 지난해 영화제에서 공개돼 호평받은 김용환 감독의 <연의 편지>를 비롯해 <호랑이 형님><미래의 골동품 가게> 등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 속속 제작 중이다. 업계 종사자로서 느끼는 실제 분위기는 어떤가

사실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업계가 힘들지 않다’는 말을 안 들어본 적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계속 작품을 만들며 싹을 틔우고 있는 것에 항상 감동받는다. 콘텐츠 지형도도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한국에서 아동용이 아닌 애니메이션이 시리즈물로 제작되는 게 거의 불가능으로 느껴졌다면 지금은 라프텔, 글로벌 OTT 같은 창구가 열렸다. 그래서 어깨가 무겁다. ‘네가 잘돼야 한다’는 영화 대사로나 나올 법한 말을 많이 들었거든. 그런 말이 부담이기도 했지만 정말 힘든 순간 ‘이건 나 혼자만의 작품이 아니야’라며 말도 안 되는 사명감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었다.


“잊지 마. 이 우주에 너를 응원하는 사람이 하나 있다는 걸”, <이 별에 필요한> 예고편에 등장했던 대사가 떠오른다

요즘 정말 사람들의 응원을 많이 느낀다. 일상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더라도, 애니메이션 신 안에서는 타인과 많은 것을 주고받으려 나름 노력했다. 작품 공개를 앞둔 지금, 따뜻하게 돌려주는 말과 관심을 보며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진짜로 하고 있다. 작품이 잘되면 좋겠다. 이걸 계기로 다른 애니메이션 감독들도 더 많은 기회를 얻고, 서로 응원할 수 있는 동료들이 생기길 바란다.


흔히 애니메이션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한다. 여전히 이 말에 공감하나

많이 공감한다. 사람들은 애니메이션을 보면 확실히 쉽게 눈물을 터뜨린다. 짧은 광고 영상인 내 작업물을 보고도 눈물 흘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데 애니메이션이 노스탤지어를 건드리는 데 특화된 부분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너 지금 사실 되게 중요한 걸 두고 왔어, 다시 떠올려 봐’ 그걸 건드리는 성인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가 하는 치유의 역할이 분명 있다고 본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로서.


공개 이후, <이 별에 필요한>의 연관 작품으로 어떤 작품이 뜨면 좋을까

미야자키 하야오. 너무 영광일 것 같다.

Credit

  • 에디터 이마루
  • 사진가 영배
  • 헤어&메이크업 아티스트 이현정
  • 아트 디자이너 민홍주
  • 디지털 디자이너 김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