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덴마크 디자인 거장이 그린 수채화

아르네 야콥센의 눈은 언제나 자연을 향해 있었다. 수채화 속에 담긴 그의 오랜 꿈.

프로필 by 윤정훈 2026.03.11

아르네 야콥센의 이름을 떠올릴 때 울창한 정원이나 들꽃을 그린 수채화를 먼저 떠올릴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가 아는 20세기 덴마크 디자인 거장의 또 다른 얼굴은 자연을 관찰하는 시간 속에서 빚어졌다. “만약 두 번째 삶이 있다면 나는 정원사가 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야콥센은 정원에 자주 머물렀다. 그가 1951년부터 머물며 작업실로도 사용했던 덴마크 스트란드베옌(Strandvejen) 413번지 정원에는 300종이 넘는 식물이 있었다. 야콥센은 작은 식물원에 가까운 이 정원에 해외여행 중 가져온 삽목 표본을 옮겨 심고, 다양한 식물의 색감과 질감, 형태를 사진과 펜, 붓 등으로 면밀히 관찰했다.


아르네 야콥센의 전기 작가 요한 페데르센(Johan Pedersen)은 어느 여름, 덴마크 북서부 구드민드루프 린(Gudmindrup Lyng)의 별장 근처 클로버 들판 한가운데서 커다란 이젤 앞에 앉아 있던 아르네 야콥센을 이렇게 떠올린다. “놀랄 정도로 빠르게, 꽃이 핀 들판의 한 부분이 텍스타일 패턴으로 종이 위에 옮겨졌어요. 모든 것은 즉각적으로 계산되고 배치됐죠. 야콥센은 생생한 자연의 인상을 탁월하게 자유로운 감각으로 종이 위에 포착해 내더군요. 마치 건축설계라는 종이 위의 노동에서 벗어나기 위한 휴식이자 놀이 같았습니다.”


야콥센의 어린 시절 꿈은 화가였다. 보다 안정적인 직업을 바란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결국 건축을 선택했지만, 특유의 예술적 감수성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야콥센의 작업에 스며들었다. 그는 평생 수채화를 놓지 않았다. 풍경과 식물을 묘사했을 뿐 아니라 주택에 들어갈 정원 설계를 위해 붓을 들었다. 그는 자신의 정원뿐 아니라 덴마크 북서부 구드민드루프 린의 여름 별장 주변, 프랑스와 이탈리아 여행에서 마주한 자연을 평생에 걸쳐 즐겨 그렸다. 야콥센은 1940년대에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식물 수채화를 남겼는데, 아이러니한 건 보기만 해도 마음이 산뜻해지는 이 그림이 야콥센이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탄생했다는 점이다.


1943년 유대인 혈통의 덴마크 시민이었던 야콥센은 노를 저어 외레순 해협을 건너 스웨덴으로 피신했다. 망명한 도시에서 건축 작업을 이어가는 게 어려워 다른 작업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이자 텍스타일 인쇄 전문가였던 요나 야콥센이 그의 그림과 수채화를 인쇄 가능한 패턴으로 옮기는 데 도움을 줬고, 당시 스톡홀름에서 북유럽 유명 디자이너들의 직물과 벽지를 생산하는 백화점 ‘노르디스카 콤파니에트(Nordiska Kompaniet)’와 협업해 1944년 봄엔 패턴 전시도 열었다.


총 16가지 패턴을 선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양식화된 패턴부터 자유로운 구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패턴 디자인을 선보였다. 특히 봄의 들판을 그대로 옮겨온 듯 자연스러운 구성의 ‘클로버(Kløver)’ ‘초원(Vegetation)’ ‘황제의 왕관(Kejserkrone)’ 같은 패턴은 당대 패턴과는 상당히 차별화되는 표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덴마크 보호령 점령이 끝나고 덴마크가 해방 되자 덴마크로 돌아온 야콥센은 1940년대 후반까지 식물 패턴 작업을 이어갔고, 이 작업은 덴마크 디자인 뮤지엄을 비롯해 여러 전시에서 소개됐으며 영국과 미국으로도 수출됐다.


야콥센의 패턴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추상적으로 흐르다 1950~1960년대에는 좀 더 엄격한 기하학적 구성을 띠기 시작했다. 야콥센의 패턴 작업은 언뜻 보면 상반된 것 같지만 그 사이엔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가 있었다. 자연이 만든 질서 속의 미묘한 불규칙에 대한 관찰은 야콥센 건축의 리듬감과 공간 구성으로 이어졌다. 모든 교실이 정원과 연결된 뭉케가르드 학교(Munkegaard School, 1957년), 건축과의 조화를 위해 직접 식물을 선정한 옥스퍼드 세인트 캐서린 칼리지(St. Catherine’s College, 1964년)처럼 건축과 자연이 공생하는 공간을 만드는 데도 많은 영감을 줬다.


아르네 야콥센의 손자 토비아스 야콥센(Tobias Jacobsen)은 젊은 시절 다락방에서 할아버지의 패턴 원단과 마주한 순간을 회상한 적 있다. 풍성한 자연과 빛, 감각적인 촉감의 원단. 낡은 상자에는 그가 여태껏 알던 할아버지의 건축이나 가구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할아버지는 자연 속에서 식물 수채화를 그리며 디자인이나 건축설계를 하듯 그림자를 세밀하게 표현하고 원하는 형태를 정확하게 잡는 데 오랜 시간을 쏟았습니다. 자신이 그리는 대상뿐 아니라 주변 공간까지 재현하려 했던 거죠. 특히 할아버지의 의자들은 엄격한 형태부터 유기적인 것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줍니다. 그중에서 앤트 체어와 세븐 체어, 에그 체어 같은 작품은 모두 자연에 대한 경의가 담겨 있어요. 할아버지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그때 다락방에 있던 천들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할 겁니다.”

Credit

  • 에디터 윤정훈
  • 아트 디자이너 김강아
  • 디지털 디자이너 김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