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머릿속 '마지막'은 어떤 모양인가요?
고전 영화 같은 신인 감독의 장편 데뷔작, '마지막 야구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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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다양한 형태의 '마지막'을 경험합니다. 시간이 흐르는 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할 사건들입니다. 어떤 '마지막'은 거대한 파도가 돼서 인생을 뒤흔들지만, 지나간 줄도 모르게 흩어진 바람 같은 '마지막'도 있습니다. 모양과 크기는 제각각이지만, 거기 아쉬움과 서운함이 남는다는 사실은 늘 같습니다. 사람들이 애써 '마지막'과 '새로운 시작'을 등치시키며 서로를 위로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마지막'에는 반드시 무언가와의 헤어짐이 동반되니까요.
영화 <마지막 야구 경기>
<마지막 야구 경기>는 학교 건립을 위해 철거되는 야구장 솔저스 필드에서 마지막 경기를 펼치는 아마추어 야구단의 이야기입니다. 지역 라디오 방송에선 내일이면 잊어버릴 테지만 오늘은 이웃들과의 스몰 토크에 인용될 시시콜콜한 뉴스들이 흘러 나오고, 동네 사람들은 너무나 익숙하게 야구장 곳곳에 자리를 잡습니다. 폭죽을 사 온 야구단원 정도를 뺀다면 누구도 '마지막'에 대한 미련이 없어 보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단원들이 담담할수록 쓸쓸함은 커집니다. 이들을 야구장 철거 전날인 일요일에 기어코 솔저스 필드로 모은 건 바꿀 수 없는 '마지막'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경기는 초반부터 삐걱댑니다. 파란 유니폼 측 선수 한 명이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는 바람에 몰수패로 게임이 끝날 위기에 처했거든요. 어찌어찌 순번은 미뤘지만, 그가 오기 전까지 게임을 고의로 지연시켜야 할 처지입니다. 때마침 도착한 지각자는 유니폼도 입지 못한 채 타석에 오르고, 안타를 때리는가 싶더니 1루도 진출하지 못한 채 넘어져 아웃을 당합니다. 그 와중에 벤치에서는 술 마실 계획을 세우고 있고요. 사실 이들은 야구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야구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야구장 바깥 풍경도 경기와 무관하게 평화롭습니다. 수십 년 동안 솔저스 필드에서 벌어지는 경기 내용을 기록해 온 할아버지, 피자를 파는 푸드트럭, 청년과 어린이들도 설렁설렁 움직이는 야구장을 저마다의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는 사이 선수들은 갑자기 조카 세례식에 끌려 가기도 하고, 맥주 한 캔 씩 마시다가 마운드에 오를 수 없을 만큼 취하기도 하죠. 30년 전에 이 야구장에서 경기를 했다는 노인이 나타나 투수를 대신하기도 하고요. 4:4 동점으로 승부를 내지 못한 채 저녁이 되자 심판은 퇴근해 버리지만, 단원들은 어두워진 경기장에 각자의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비춰 경기를 계속합니다. 공도 몇 개 없어 한 번 멀리 날아가면 풀숲을 찾아 헤매야 하는 상황입니다. 개중에는 아이를 재워야 한다며 집에 간 선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들은 '마지막 경기'의 끝을 보고자 합니다.
영화 <마지막 야구 경기>
영화는 '마지막'을 향해 느리게 흘러가는 솔저스 필드의 시간 틈바구니에 시간을 초월한 명언들을 끼워 넣습니다. 경기의 내용과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이 대비를 통해 작품이 가시화하는 데 성공한 건 '마지막'의 다면성입니다. 솔저스 필드에서의 시간이 끝났다고 거기서 보낸 시간이 증발하는 건 아닙니다. 1920년대에 설치된 삼각형 맨홀이 전부 교체돼도 그 자리에 존재했던 시절이 사라지는 건 아니고요. 프레데릭 와이즈먼이 세상을 떠났어도 그의 목소리가 <마지막 야구 경기>에 담겨 시간을 뛰어넘은 것처럼요. 흔히 '마지막'이란 말에서 차갑거나 서러운 단절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마지막'은 그 이전의 실타래 같은 기억들을 품은 채 묶인 따뜻한 매듭으로 다가옵니다.
영화 <마지막 야구 경기>
<마지막 야구 경기>의 원제는 야구 구종 중 하나인 '이퍼스(Eephus)'. 느리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공이라 아마추어도 던질 수 있는 스타일인데요. 프로들의 세계에서 볼 땐 시속 160km/h까지 날아가는 공 다음에 갑자기 이퍼스볼이 나오면 타자가 당황할 수밖에 없죠. <마지막 야구 경기>는 스포츠 영화계의 이퍼스볼 같습니다. 으레 야구장을 지키겠다고 호들갑(?)을 떠는 인물들이 하나로 뭉쳐 극복과 쟁취의 서사를 일궈야만 할 것 같은 상황인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경기도 선수도 관중도 무미건조하고 심드렁해 보입니다. 하지만 가만히 보면 <마지막 야구 경기>의 모두가 솔저스 필드의 마지막을 각자의 속도로 지켜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요.
'마지막'이 주는 서운함 이상의 감정을 되살리는 것은 이 영화의 탁월한 점입니다. 가끔은 '마지막'보다 사실은 그 사건이 나를 아주 망치지는 못한다는 것에 훨씬 더 서운해질 때도 있습니다. '마지막'을 맞기 전까지 쌓은 시간과 기억들이 두터울수록, 그걸 나눈 사람들이 많을 수록 더욱 그렇죠. 마지막 야구 경기를 하러 모인 선수들도 입을 모아 "야구 하자고 두 마을을 건너갈 순 없다"고 말하면서도 비슷한 서운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Credit
- 에디터 라효진
- 사진 필름다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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