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7 루이 비통 크루즈 쇼에서 부활한 키스 해링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2027 루이 비통 크루즈 쇼에서 시도한 충돌과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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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해링의 작품이 가죽 재킷 위에서 재탄생했다.
2025년 레너베이션을 마친 뉴욕의 프릭 미술관.
크루즈 쇼마다 호기심을 자극하며 탐험하고 싶은 어딘가로 이끄는 패션 하우스들. 그중 트렁크가 상징하는 ‘여행’이라는 키워드에 유독 진심인 루이 비통은 왕궁부터 근현대 건축물, 역사적 공원, 사적인 공간에 이르기까지 컬렉션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는 곳이라면 망설임 없이 깃발을 들고 앞장서곤 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현대미술가 키스 해링(Keith Haring)의 작품에서 출발한 이번 크루즈 쇼가 뉴욕에서 펼쳐진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지난 2020 크루즈 쇼를 위해 JFK 공항을 선택한 이후 뉴욕에서 열린 두 번째 크루즈 쇼장은 어디였을까? 첫 번째 쇼가 파리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착륙한 곳이었다면, 7년 만에 돌아온 쇼는 뉴욕의 가장 사적인 공간 중 하나로 향했다. 바로 프릭 미술관이다.
산업가 헨리 클레이 프릭이 소장했던 미술품.
뉴욕 맨해튼 어퍼 이스트 사이드 5번가와 70번가가 만나는 곳. 1935년 문을 연 미술관은 산업가 헨리 클레이 프릭이 세상을 떠난 뒤, 그가 저택에 소장했던 미술품을 대중에 공개하면서 탄생했다. 2025년 레너베이션을 마친 미술관에서 처음으로 패션쇼가 열리던 날. 회화와 조각, 장식미술품들이 방과 복도 곳곳에 자리한 풍경은 누군가의 저택에 초대받은 기분이 들게 했다.
“두 세계의 대립이죠. 다운타운과 업타운을 한데 가져오면 흥미로울 것 같았어요.”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프릭 미술관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렘브란트, 르누아르, 휘슬러 등 그림 속 인물들과 젠데이아, 펠릭스, 케이트 블란쳇 등 프런트 로를 채운 셀러브리티들이 한 공간에 자리한 가운데 피치스의 ‘Boys wanna be her’가 울려 퍼졌다.
시대적 요소가 미래적 디자인 안에 공존한 크루즈 룩.
팝’아트 적인 디테일의 스피디 백.
첫 번째 모델은 그런지 카디건에 데님 재킷을 허리에 묶고 오래된 가죽 트렁크를 무심하게 들고 등장했다. 특별히 꾸민 것 같지 않은 차림이었지만 그녀의 손에 들린 트렁크에는 키스 해링의 낙서가 새겨져 있었다. 1930년대에 제작된 루이 비통 트렁크에 키스 해링이 그림을 그린 아카이브 피스. 쇼를 위해 새로 만든 소품이 아니라 스토리가 담긴 실제 제품이란 점이 흥미로웠다. 가죽 표면에 남은 세월의 흔적과 그 위에 그려진 자유분방한 선. 서로 다른 시대의 물건들이 뒤섞여 새로운 장면을 만들고 있었다.
미국을 상징하는 소박한 캐주얼 룩으로 시작한 쇼는 업타운과 다운타운, 정교함과 ‘쿨’함을 자유롭게 오갔다. 가죽 재킷 아래에는 복서 팬츠가, 초상화 속 귀부인의 옷장에서 꺼낸 듯 풍성한 프릴 톱 아래에는 카프리 팬츠가 등장했다. 고풍스러운 프린트 블라우스와 카고 팬츠도 짝을 이뤘다. 몸을 단단하게 감싸는 가죽과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얇은 패브릭, 과장된 어깨와 맨살이 드러나는 쇼츠, 보머 재킷과 스포츠웨어. 상반된 요소들이 맞닿는 부분마다 제스키에르 특유의 재치가 드러났다.
아름답게 주름 잡힌 블라우스 아래에 느닷없이 투박한 팬츠를 입히거나, 격식을 갖춘 차림에 운동장에서 막 신고 나온 듯한 신발을 더하는 식. 덕분에 과거의 복식에서 빌려온 옷들도 박물관 전시품처럼 보이지 않았다. 우아하게 보이려 하지 않는 태도. 제스키에르가 오래도록 고수해 온 취향이 이번에도 빛을 발했다.
1930년대 루이 비통 트렁크에 키스 해링의 낙서가 더해진 제품을 들고 등장한 첫 번째 모델.
쇼가 이어질수록 키스 해링의 그림은 점점 존재감을 키웠다. 1980년대 뉴욕 지하철역에 그렸던 그래피티는 단단한 가죽 위에 옮겨졌고, 분필로 그어 내려간 구불구불한 선은 입체적인 장식으로 바뀌었다. 키스 해링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선에 주저함이 없다는 것이다. 굵고 단순한 윤곽선 몇 개로 사람이 춤추고, 개가 짖고, 온갖 사물이 살아 움직인다. 작품을 오래 들여다보지 않아도 곧장 에너지가 전해진다.
루이 비통은 이 낙서 같은 그림을 다루는 데 꽤 많은 공을 들였다. 평면적인 선을 가죽 절개와 장식으로 표현하고, 손으로 그린 듯한 불규칙한 형태를 정교한 제작 기술로 구현했다. 단번에 그린 그림을 재현하기 위해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뉴욕의 일상을 담은 액세서리도 빼놓을 수 없다. 테이크아웃 용기, 지하 재즈 바를 떠올리게 하는 LP, 콜라 캔까지. 기념품 숍에서나 마주칠 법한 물건들이 가방이 돼 런웨이에 등장했다. 유쾌한 웃음부터 나오게 하는 제스키에르만의 위트다. 뉴욕 여행을 마친 사람이 가방에 담아오는 건 꼭 값비싼 기념품이 아닐 테니. 사소한 물건 하나가 도시를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되기도 한다.
다양한 시대와 소재, 패턴이 뒤섞인 크루즈 룩.
다양한 시대와 소재, 패턴이 뒤섞인 크루즈 룩.
키스 해링의 작품이 담긴 알마 백.
클래식한 모노그램 스피디 백과 알마 백도 얌전히 있지 않았다. 키스 해링의 그림이 가죽 위를 돌아다니고 달러와 라이터, 병뚜껑처럼 뉴욕 거리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물건이 ‘팝’ 아트처럼 겹쳐져 표면을 장식했다. 익숙한 가방의 형태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위에 새 시즌의 언어를 장식으로 더한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새로운 실루엣을 만들지 않아도 충분히 새로운 물건처럼 보일 수 있다는 사실. 오랫동안 사랑받은 디자인을 가진 브랜드만이 보여줄 수 있는 변주이기도 하다.
슈즈에는 제스키에르가 즐겨 사용하는 미래적 감각이 듬뿍 담겼다. 복싱화와 축구화를 연상시키는 형태에 끈 없이 신고 벗는 구조를 더한 신발들. 고풍스러운 블라우스나 정교하게 재단한 아우터웨어 아래에 이 신발이 등장할 때면 시선이 자꾸 발끝으로 향했다. 특히 발등을 감싼 매끈한 형태와 반복적인 패턴, 스포티한 밑창은 모델들이 걷는 모습까지 다르게 보이게 했다. 미술관의 조용한 방과 복도에 미래적인 메탈릭 슈즈엔 우주와 sf 장르에서 영감을 얻어온 제스키에르의 취향이 분명히 담겨있었다.
박서 쇼츠와 모노그램 패턴, 메탈릭 슈즈가 충돌과 조화를 이뤘다.
음악이 바뀌고 피날레가 이어진 뒤,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데님 세트업을 입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쇼의 첫 모델이 입었던 옷차림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파리에서 뉴욕으로, 오래된 저택에서 지하철역으로, 귀족적인 옷장에서 거리의 캐주얼 웨어로. 짧은 시간이지만 쇼를 통해 꽤 먼 곳을 여행한 기분이었다. 쇼가 끝난 뒤에도 첫 모델이 들고 나왔던 낡은 트렁크가 떠올랐다. 키스 해링은 그 위에 그림을 그릴 때 훗날 이 물건이 프릭 미술관에서 열린 루이 비통의 크루즈 컬렉션에 등장할 거라고 상상했을까?
‘예술은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믿으며 거리에서 그림을 그렸던 해링과 뉴욕의 일상적인 물건을 공들여 만든 가방 위에 옮겨놓은 제스키에르. 두 사람이 같은 시대를 살았다면 어떤 이야기를 나눴을지 궁금해졌다. 서로 다른 시대의 감각을 자유롭게 뒤섞고, 예상치 못한 조합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일에 꽤 마음이 잘 맞지 않았을까. 이번 컬렉션도 마찬가지다. 과거와 미래, 예술과 일상이 만나는 순간 뜻밖의 조화가 탄생했다. 미래적인 운동화를 신고 미술관을 나서는 모델들의 발걸음에서 뉴욕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쳐 보였다.
Credit
- 글 김지호
- 아트 디자이너 정혜림
- 디지털 디자이너 석지윤
- COURTESY OF LOUIS VUIT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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