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산딸기와 오디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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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이란 언제를 의미하는 걸까? ‘초등학생 때’라면 구체적으로 느껴지고 ‘아가씨였을 때’라 하면 왠지 머리 모양과 옷까지 상상되는데 ‘어릴 적’이라는 말은 흐릿하기만 하다. 제법 오랜 친구가 된 대학 동기들은 “우리 어릴 때 말이야”라며 스무 살을 추억하고, 동생과는 일곱 살 무렵을 두고 ‘어릴 때’라고 말하는 걸 보면 어리다는 건 참 상대적이다. 그렇기에 각자의 어린 시절은 절대 서로 겹치지 않는 공통감각 같은 것일지도.

나에게 어릴 적은 아마도 여섯 살 이후부터 시작된 아파트 생활로 기억된다. 지방 소도시의 아파트 단지, 알람으로 시작되던 아침, 출근하는 아빠 손을 잡고 등교하던 기억이 내 어린 시절을 여는 장면이다. 신호등을 두 개 건너야 학교에 갈 수 있었는데, 첫 번째 신호를 놓치면 꼭 그날 하루가 뒤죽박죽 꼬였다. 그래서 아빠가 내 손을 잡고 “뛰어!” 하면 우리는 운동선수도 아니면서 아침마다 출근길 달리기 시합을 했다. 일상이 반복되는 도시의 삶은 참으로 지루하고 익숙했다. 이 세계에 틈이 생긴 것은 여름 초입이었다.

초여름이 되면 우리는 차를 타고 어딘가로 떠났다.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어린 내 눈엔 그저 시골길일 뿐이었다. 길가엔 차도 사람도 없었고, 논인지 밭인지 야산인지 분간도 안 되는 초록색 바다 위로 풀이 덤불을 이뤘다. 엄마는 차를 세우고 다 왔다고 했다. 그곳 나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산딸기였다. 산딸기! 이름만 들어도 침이 고인다. 작고 통통한 알갱이 하나하나가 모여 송이송이를 이루고, 입에 넣으면 톡 하고 터지면서 새콤함이 번져온다. 눈이 반짝 뜨이는 가운데 느긋한 달콤함이 마무리를 장식한다. 문제는 그 녀석들이 자라는 곳이다. 바로 가시가 가득한 덤불 속. 팔뚝이 긁힐 각오를 하고 덤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꺼내면 보이는 선명한 핏빛 열매가 바로 산딸기. 입에 넣으면 초여름이 혀를 통해 머리끝까지 뛰어드는 것 같다. 양동이 하나 가득 산딸기를 채우려면 오후 내내 걸렸다. 반은 입으로 들어가고 반은 양동이로. 집에 돌아와서는 며칠 내내 산딸기 파티다. 그냥 먹고, 잼으로 먹고, 생크림을 올려 먹고, 식사로 간식으로 후식으로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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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여름엔 자전거를 타고 천변을 달리다가 거뭇거뭇한 땅을 발견했다. 위를 올려다보니 그건 바로 오디. 산딸기가 새콤하고 가벼운 맛이라면, 오디는 달콤하고 무겁게 혀를 감싸는 맛이 있다. 입에 넣는 순간 즙이 터지며 진한 단맛이 번지고 혀랑 입술, 손끝까지 보랏빛으로 물든다. 그날은 담을 데가 없어 따는 족족 입에 넣었다. 입은 물론 입꼬리와 손끝까지 엉망진창인 채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과일가게 앞에서 ‘오디 한 박스 1만2000원’이라는 팻말을 보고 잠시 고민했다. 배부르게 오디 맛을 본 터라 기쁨과 만족을 집까지 가져가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오디의 행복은 오늘의 우연으로 마무리.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가면서 어떤 추억과 경험은 자꾸만 유료 결제로 전환되는 기분이다. 세상이 풍요로워진다는데 돈을 지급해야 누릴 수 있는 것이 점점 늘어난다. 어릴 적엔 오디도 아무 데서나 따 먹었는데. 이것이 도시의 삶인가!

올해도 산딸기와 오디를 기다린다. 여름은 산딸기와 오디가 열어젖히는 세계다. 아주 짧고 새콤한 순간의 축제. 내 어린 시절이 산딸기를 따러 가는 여름이듯, 삶의 어떤 구간은 다른 추억으로 기록된다. 한 시절을 구분 짓고 시절의 시작과 끝을 정해주는 건 오직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일상은 지루하기 쉽다. 끊임없이 똑같은 시간의 하루가 주어지고 똑같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매일 같은 화장실에 들어가 같은 순서로 머리를 감고, 이 닦고, 세수하고, 옷 입고, 머리를 말리고 나오면 비로소 어제와 다를 것 없는 하루가 시작된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1년 후에도 우리는 머리 감고 이 닦고 세수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삶이란 건 누가 방향을 알려주지도, 위치를 짚어주지도 않는 여정이다. 그래서 지금 어디에 서서 어디를 향해 나아가는 중이란 걸 스스로 확인해야 한다. 죽기 전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 시간의 리듬을 만들어 삶을 살아 있게 하자. 필요하다면 계절과 제철 음식으로 일 년을 축하하자. 나에겐 그런 시절이 많이 있었다. 어떤 시절에 나는 밤마다 산책을 했다. 그 시절 나는 실연의 괴로움을 걸으면서 털어냈다. 또 다른 시절에 나는 작은 집을 부지런히 쓸고 닦았다. 힘에 부치고 똑같은 매일에 실망할 때도 있었지만, 시간이 흘러 집안일도 적당히 빠르게 해치우는 어른이 됐다. 또 다른 시절의 나는 글을 썼다. 많은 날 동안 문장과 단어뿐이었지만, 어떤 날엔 글이 됐다. 그 시절이 쌓이고 쌓여 꿈에 그리던 삶을 살고 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는 어느 시절을 보내고 있을까? 그 시절의 여름에도 나는 산딸기와 오디를 맛볼 것이다. 비록 슈퍼에서 사온 것이라 해도 기꺼이. 여름은 산딸기와 오디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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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희

엘르보이스의 최신 소식을 전하는 에디터입니다. 다양한 소식을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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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터 전혜진
  • 아트 디자이너 이아람
  • 디지털 디자이너 김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