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적인 상상력과 기발한 아이디어가 주는 충격은 패션이 가장 사랑하는 요소다. 이번 시즌 역시 개성이 뚜렷한 디자이너들이 자신들의 독특한 창작세계를 런웨이에 펼쳐냈다. 어린 시절 처음 봤던 과학 실험처럼 놀랍고 재미있는 경험을 선사하면서! 실제로 ‘패션 과학자(Fashion Scientist)’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디자이너 모리나가 쿠니히코의 브랜드 언리얼에이지는 커다란 풍선을 입은 것 같은 볼륨 드레싱을 선보였다. 특이점은 기존 방식으로 와이어를 쓰거나 솜을 채운 것이 아니라 공기를 잔뜩 불어넣어 물풍선 같기도 하고, 구름처럼 둥실둥실 떠다니는 모습을 연출했다는 것.
ALAIA
ANREALAGE
여기에 사이버틱한 실버 메이크업과 더듬이가 연상되는 헤어피스까지 더해 마치 사이보그 요정처럼 완성했다. 실루엣을 부풀리는 데는 듀란 랭티크도 일가견 있다. 평소 옷의 한 부분만 엄청나게 과장시켜 인체의 실루엣을 자유자재로 바꿔온 그는 이번 시즌 원피스 수영복에 튜브를 더한 보디수트로 수영장에서 튜브를 끼고 뒤뚱뒤뚱 걷는 사람을 상상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패드를 잔뜩 집어넣어 어깨를 한껏 솟아오르게 만든 크롭트 톱, 핸드백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 태연한 얼굴로 워킹하는 모델들은 이색적이면서 유쾌한 에너지를 뿜어냈다. 그런가 하면 듀란 랭티크가 ‘정말 좋아한다’며 팬을 자처한 인물도 있다. 엘렌 호다코바 라르손이다. 낡은 숟가락부터 해진 넥타이까지 버려진 물건으로 옷을 만드는 그는 놀이처럼 재미있는 접근으로 자신만의 패션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특히 커다란 액자 속 그림을 뚫어 만든 드레스와 벨트 수십 개를 엮어 만든 가죽 스커트는 그야말로 ‘신박하다’는 표현이 절로 떠오르는 룩!
ANREALAGE
호다코바처럼 기발한 상상력으로 버려진 재료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실험가는 또 있다. 폭죽을 1000개쯤 동시에 터뜨린 것처럼 보이는 폭발적인 실루엣의 리본 드레스, 온몸에 반짝이 스트랩을 휘감아 인간 크리스마스트리처럼 꾸민 보디수트, 비즈 수만 개를 꿰어 탬버린처럼 찰랑거리는 프린지 드레스까지. 모두 데뷔 때부터 ‘슈퍼 루키’로 불리며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케빈 제르마니에의 작품이다. 학생시절 돈이 부족해 이불을 뜯어 과제를 만들었던 경험에서 착안해 버려진 부자재와 부속품을 업사이클링하는 그의 작업에 절제란 없다. 맥시멀리즘을 향해 하나의 룩에 수많은 장식을 거침없이 쏟아붓는 것이 그의 시그너처. 게다가 이번 2025 S/S 시즌 오트 쿠튀르 패션 위크에서 자신의 첫 쿠튀르 컬렉션까지 선보인다니 그의 화려한 컬렉션에 대한 기대가 급부상 중이다. 이 외에도 라텍스에 공기를 불어넣어 ‘인간 풍선 룩’을 선보인 해리, 매번 신선한 쇼 형식으로 밀란 패션위크의 ‘꿀잼 쇼’로 소문난 아바바브 등 유쾌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무장한 디자이너들이 패션의 경계를 넓히고 있다.
DURAN LANTINK
COMME DES GARÇONS
하지만 이들이 처한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얼마 전 14년 만에 브랜드 운영을 종료한다고 밝힌 와이프로젝트와 지난해 파산을 선언한 디온 리를 떠올려보자. 누구도 와이프로젝트의 독창성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팬데믹 이후 매출이 급감하며 위기를 맞았고, 로살리아와 벨라 하디드, 블랙 핑크와 뉴진스가 사랑했던 디온 리 역시 투자자를 찾지 못해 문을 닫았다. 그 외에도 최근 몇 년간 마라 호프만, 뱀파이어스 와이프, 캘빈 루오, 하로우 등 여러 브랜드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들은 모두 실험적이고 독특한 디자인 세계를 추구하고, 하이패션의 주류는 아니었지만 하위문화의 마이너 코드를 패셔너블하게 재해석하며 마니아 층을 거느리고 있는 레이블이었다.
GERMANIER
이런 혹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도전적인 패션세계를 펼치고 있는 디자이너들은 지금 치열하게 고군분투 중일지도 모른다. 독창적인 디자인일수록 그 옷을 사고 싶어 하는 이들의 수는 적어지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소위 ‘팔리는 옷’을 만들지 않는 것은 이들의 철없는 고집이 아니라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정체성에 가깝다. 게다가 희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니콜라 제스키에르, 조너선 앤더슨, 안토니 바카렐로…. 지금 하이패션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스타 디자이너들은 결코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을 멈춘 적 없다. 패션 신에 예술성을 불어넣고, 패션의 정의를 확장시키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관심과 응원일 테다. 지금의 불경기가 불러온 콰이어트 럭셔리의 바람이 당신을 침묵시키려 해도 그 표현을 멈추지 말라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커다란 응원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