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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다 스윈턴이 큐레이팅한 전시 ‘슈퍼소닉 메디벌’, 아티스트와의 인터뷰

메리애나 케네디의 작품을 보면 18세기 중세 예술이 21세기 디자인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

프로필 by 윤정훈 2025.08.12
메리애나 케네디와 틸다 스윈턴. 배경은 메리애나 케네디의 집으로, 스트로베리 힐 호텔의 블루 베드룸에서 영감을 받아 푸른색 안료로 칠했다. 주변에 놓인 금박 거울, 러스틱 화병, 레진 촛대, 페인팅 엠블럼(Painting Emblem)은 모두 메리애나의 작품.

메리애나 케네디와 틸다 스윈턴. 배경은 메리애나 케네디의 집으로, 스트로베리 힐 호텔의 블루 베드룸에서 영감을 받아 푸른색 안료로 칠했다. 주변에 놓인 금박 거울, 러스틱 화병, 레진 촛대, 페인팅 엠블럼(Painting Emblem)은 모두 메리애나의 작품.

지난 5월 배우 틸다 스윈턴과 파리에서 개인전 <슈퍼소닉 메디벌 Supersonic Mediaeval>을 열었다. 틸다 스윈턴이 큐레이터로 참여한 이번 전시는 어떻게 진행됐나? 두 사람의 인연이 궁금하다

전시는 세계적 경매사 크리스티(Christie’s)가 주최하는 특별전 ‘카르트 블랑슈(Carte Blanche)’의 일환으로, 파리 마티뇽 거리 9번지에서 1주일 동안 열렸다. 틸다와는 오래전 친구의 소개로 만나 공감대를 형성했다. 우리에게 과거는 언제나 새로운 것이었고, 협업과 경계를 넘나들기 좋아하는 지점도 닮았다. 전시 제목인 ‘슈퍼소닉 메디벌’은 역사적 뉘앙스를 지닌 강렬한 오브제를 뜻하며, 이 역시 틸다의 아이디어다. 내 스튜디오와 집에 있는 다양한 작품을 전시장으로 옮겨와 오랜 거주지이자 영감의 원천인 런던 스피털필즈(Spitalfields) 지역에서 착안한 연극적 분위기의 배경으로 전시를 구성했다. 이번 전시를 위해 짧은 영상도 만들었는데, 영화감독 데릭 저먼과 함께한 그녀의 초기작이 떠올라 무척 즐거웠다.



중세 시대 식물 패턴을 입은 캔들은 ‘라이터 댄 에어(Lighter Than Air)’.

중세 시대 식물 패턴을 입은 캔들은 ‘라이터 댄 에어(Lighter Than Air)’.

캐나다에서 태어나 더블린 국립예술대학과 런던 슬레이드 예술학교에서 공부하고, 대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스피털필즈에 거주하고 있다. 이곳에 정착한 계기는

더블린과 스피털필즈에서 머물렀던 지난날, 나는 18세기 건축물에 둘러싸여 살았다. 놀랍도록 순수하고 현대적인 그 건물들은 내게 비례와 단순함에 대한 감각을 가르쳐줬다. 친구 덕분에 스피털필즈에는 우연히 발을 들였다. 슬레이드 예술학교 재학 시절 지역 역사 보호 운동의 일환으로 친구가 푸르니에(Fournier) 거리에 버려진 집을 샀고, 이를 함께 고쳐 살았다. 역사적 공간을 세심하게 복원하는 과정에서 공예와 장인 정신에 대해 많은 걸 배웠다.



런던 속 작은 베니스를 연상케 하는, 건축가 윌리엄 스몰리와 함께 베네치아식으로 증축한 집. 스피털필즈에 위치한 메리애나의 작업실 외관.

스피털필즈에 있는 당신의 공간은 어떤가? 집과 작업실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면

작업실은 집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으며, 시장과 원단 상점으로 둘러싸여 언제나 좋은 자극이 된다. 작업실 쇼윈도는 오랜 동료인 디자이너 짐 호잇(Jim Howett)이 19세기 원형을 재해석한 것이다. 집은 건축가 윌리엄 스몰리(William Smalley)와 함께 전통 기법을 활용해 현대적으로 증축했다. 전통 석회 마감, 옛 벽돌과 조약돌, 베니스에서 제작된 철제 장식이 어우러져 있는데, 카를로 스카르파와 작업한 금속 장인 파올로와 프란치스코 자논 형제의 솜씨다.



붉은색 래커 처리한 상판과 청동 다리가 결합된 ‘에버 프레젠트(Ever present)’ 테이블.

붉은색 래커 처리한 상판과 청동 다리가 결합된 ‘에버 프레젠트(Ever present)’ 테이블.

그 공간에서 소중히 여기는 사물이 있다면

스피털필즈의 시계 제작자 로버트 크루시픽스(Robert Crucefix)가 만든 거실의 랜턴 시계. 이 시계의 종소리는 우리 집의 심장 같은 존재다. 짐이 디자인하고 자논 형제가 만든 모던한 선반 위에 놓여 있어 개인적으로 더 각별한 의미가 있다.



플래티넘 유리에 블랙 파티나 처리한 청동 테두리를 지닌 거울 ‘배지 오브 포엣(Badges of Poets)’.

플래티넘 유리에 블랙 파티나 처리한 청동 테두리를 지닌 거울 ‘배지 오브 포엣(Badges of Poets)’.

전통과 현대의 극적인 조합을 시도한 당신의 작품을 보면 18세기 중세 예술이 21세기 디자인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 촛대와 조명, 거울 등의 작품은 용도가 분명하지만 형태는 무척 조각적이다. 작품을 만들 때 어떤 상상을 하나

나는 다양한 안료나 오래된 책 속의 인쇄물, 한 편의 시, 산화한 고대 청동기 유물의 파티나(Patina), 고건축 등에서 영감을 받는다. 이런 영감의 목록을 토대로 역사적 형태를 현대적 시선으로 되살리는 과정을 거친다. 내 작품이 공간에 고요히 자리 잡길 바란다. 골동품이 놓일 자리에 새로운 오브제가 자연스럽게 놓이듯 말이다.



 레진을 섬세하게 가공해 제작한 램프.

레진을 섬세하게 가공해 제작한 램프.

유리, 레진, 청동, 나무 등 인류가 오래전부터 다뤄온 재료들을 전통 공예 방식으로 직접 가공하거나, 지역 장인들과 협업해 작품으로 완성한다. 이렇게 의도적으로 고전적 스타일을 고수하는 이유는

나는 고대 청동 유물을 좋아하는데, 볼 때마다 새로운 영감을 얻는다. 청동은 다루기 어려운 재료 중 하나다. 특히 녹청을 내는 작업은 만만치 않다. 2023년 밀란의 루이지 로바티 재단(Fondazione Luigi Rovati)의 의뢰를 받아 ‘호르투스 알케미쿠스(Hortus Alchemicus)’라는 시리즈를 선보인 적 있다. 녹청에 대한 관심, 연금술에서 유래한 고대 기술인 화염 도금을 향한 호기심에서 출발해 여섯 개의 청동 거울을 전시했다. 전통 소재가 지닌 고유의 속성을 사랑하고, 그 소재를 다루는 기법에 늘 매료돼 왔다. 역사학자 댄 크뤽섕크(Dan Cruickshank)는 내 거울을 보고 “조각가, 도금사, 유리공, 예술가 등 수많은 기술이 조화롭게 결합돼 단일한 비전을 실현한 드문 예”라고 말해 주기도 했다. 장인 정신에 담긴 시적 가치와 한 겹 한 겹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즐거움을 이해하는 일은 내게 무척 중요하다.



카민 레드에 초록색으로 염색된 볼록 유리로 이루어진 ‘카민 미러(Carmine Mirror)’. 책 표지 천을 사용한 블라인드. 에버 프레젠트 테이블 상판 디테일.

스스로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장식가에게는 다소 어렵고, 예술계 사람들에게는 올드해 보일 수 있다”고 이야기한 적 있다. 어떤 곳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고 경계 넘나들기를 즐겨하는 것 같다

예술 작품과 장식적 오브제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 작업은 늘 도전적이면서도 흥미롭다. 책을 감싸는 천으로 만든 블라인드와 레진 조명 등은 예술과 장식의 경계를 허물며 공간에 새로운 분위기를 더한다. 시대를 초월한 변화와 시적 감각이 일상에 자그마한 균열을 내는 것이다.



메리애나와 그녀의 작업실.

메리애나와 그녀의 작업실.

전통 속에서 늘 새로움을 찾는 당신의 여정은 이제 어디를 향할까. 앞으로 새롭게 시도하고 싶은 재료나 기술이 있다면

지난해 샤넬 2024/2025 공방 컬렉션의 일환으로 틸다 스윈턴과 빔 벤더스가 만든 단편영화가 큰 영감이 됐다. 특히 영화에 코코 샤넬이 소장했던 항저우의 코로만델 병풍이 인상적이었다. 나 역시 금박과 색색의 래커 칠, 불타는 집과 나무를 그려 넣은 모던한 병풍을 만들어보고 싶다.

Credit

  • 에디터 윤정훈
  • 아트 디자이너 김강아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
  • COURTESY OF MARIANNA KENNE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