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모태솔로여도 난 널 사랑할 거야
어색한 고백도 그저 아름답기만 했던 시절. 우리 모두의 미숙한 순간을 그린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가 던진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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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포그래피 STUDIO VUE
“하드웨어는 괜찮은데 소프트웨어가 조금 윈도 98 같은 느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누가 자기소개를 이렇게 할까? 외모는 괜찮지만 내면은 고칠 게 많은 자신을 어렵게 설명한 주인공은 1998년생 모태솔로 ‘노재윤’ 씨다. “너랑 결혼할 것 같아.” “너는 나한테는 사랑이야.” 1999년생 모태솔로 ‘하정목’과 ‘박지연’의 첫 만남 이후 5일 만의 대화다. 이처럼 뚝딱거리고, 감정을 ‘급발진’하는 모태솔로들을 제주도의 한 공간에 모아놓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피톤치드형 연프’라고 불릴 만큼 티 없고 순수하고 무해한 모태솔로 메이크오버 연애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가 그 일을 벌였다. 출연자들은 나이와 직업, 사회적 위치 모두 달랐지만, 첫 연애를 앞둔 순간 모두 같은 출발선에 섰다.
연애 프로그램의 묘미인 첫 등장 신에서부터 남다른 모습. 어색한 침묵만 흐르고 서로 눈치를 살피느라 바쁘다. 마음에 드는 이성이 등장해도 놀라거나 선뜻 말을 걸지 않는다. 보는 내가 다 땀이 삐질삐질 날 만큼 어색하다. 멍한 상태로 있는 것 같지만 이들도 나름 이성을 ‘스캔’한다.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지만 몰래 슬쩍슬쩍 쳐다보는(다 티 나는) 행동으로. 첫인상 선택 후 첫 데이트가 이뤄진 롤러장에서도 이들의 소극적인 모습은 여실히 드러난다. 음악은 경쾌하게 흐르고, 조명은 설렘을 부추겼음에도 남자들은 꿋꿋이 스케이트만 탄다. 자기들만의 올림픽 경기가 열린 듯 눈빛이 국가대표 못지않다. 롤러장 한편에서 스케이트를 못 타는 지연의 양팔을 잡고 돕는 건 여성 출연자들. 보편적으로 알려진 모태솔로의 특징이 슬며시 고개를 드는 순간이다. 대화의 기술이나 연애 전략이 없는 이들은 다가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어쩌면 이 장면은 우리 각자 ‘첫 연애’라는 세계에 처음 들어섰을 때를 비추는 거울 같기도 하다. 연출을 맡은 김노은 PD는 롤러장 장면을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먼저 타는 법에 익숙해진 후 도움을 줘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정목 씨가 ‘여성 출연자들을 잡아줘야 한다는 걸 알지만 대참사가 일어날까 봐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말했잖아요. 나중에 재윤 씨는 ‘보호대 묶어줄까?’라고 넌지시 말하기도 했고요. 그 상황 속에서 이들은 아주 사소한 노력이자 나름의 ‘플러팅’을 했던 겁니다. 현장에서는 못 느꼈지만 편집본을 보며 이렇듯 작게 빛나는 순간이 보였어요.” 회차가 거듭될수록 스멀스멀 미소가 피어오른다. 어쩌면 모두 이런 궁금증이 일 것이다. 서툰 이들이 왜 이토록 사랑스럽게 느껴질까?
이 프로그램은 곳곳에서 이성과 연애 앞에 미숙한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마음에 드는 이성 옆에 앉은 게 전략적 행동이 아니라 그저 선풍기 바람이 가까워서라는 ‘상호’의 얻을 것 없는 계산부터 만나자마자 “결혼할 수도 있겠다”고 속도 조절 없이 던져버린 말은 정목의 경험 부족, ‘현규’가 마지막 순간에 “사랑했다, 강지수!”를 외치며 넘치는 감정을 폭발시킨 장면은 주체할 수 없는 과잉 그 자체다. 그중에서도 모두 속절없이 당한 장면은 재윤의 ‘철퍼덕’ 사건. 재윤이 ‘여명’에게 “(너를 사랑하지만) 놓아줄게”라고 선언하자 여명은 출연자 ‘지연’에게 황당하고 어이없는 감정을 털어놓는데, 이때 재윤이 다급히 풀숲에 엎드린 채 그 대화를 얼떨결에 엿듣게 된 장면은 다시 우리의 미숙한 시절을 불러왔다. 들켜서는 안 되지만 듣고 싶은 확신의 말, 다가가지는 못하지만 말은 걸고 싶은 속마음, 본능적으로 폭발하는 감정을 조절 없이 내비치고 싶은 욕구는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감정의 원형이다. 조욱형 PD는 이렇게 말한다. “첫 번째 연애를 하기 전에는 다 모태솔로인 상태잖아요. 누구나 사랑 앞에 미숙한 경험은 갖고 있으니 공감하실 거예요. 우리 모두 첫 연애의 시기가 있었으니까요.” 인간은 투박하고 우스꽝스럽고 미숙한 첫사랑에 매혹된다. 심리학자들은 첫사랑을 ‘정서적 각인’의 순간이라고 한다. 처음 경험하는 강렬한 감정은 뇌 속에서 도파민과 옥시토신을 쏟아내며 뚜렷하게 새겨진다. 마치 돌연 사랑 고백을 한 정목과 현규처럼. 그래서 우리는 첫사랑의 기억을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 쉬는 감정처럼 간직한다. 당시의 공기와 빛, 심장박동까지 재현하며!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가 공감을 끌어내는 힘은 바로 이 본능적인 기억에 있다. 누군가의 첫 고백과 첫 스킨십은 단순히 그들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과거와 겹쳐진다.
흔히 리얼리티에서 생략되는 어색하고 미숙한 웃음, 망설이다 타이밍을 놓치는 답답한 장면, 잘 보이고 싶은 마음과 솔직하고 싶은 마음이 부딪치는 순간이 여기서는 메인이자 핵심 서사다. 누가 누구와 맺어지느냐 하는 결말과 플러팅 고수의 무기를 공개하는 것보다 그 서툰 첫걸음을 솔직하게 보여준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이라이트는 그들이 점점 성장해 나간다는 것. 내적 · 외적 메이크오버를 통해 재윤은 점점 상대의 눈을 바라보며 솔직하게 말할 줄 알게 되고, 지연은 어릴 적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좋아하는 이성과 연인이 된다. 스토킹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해 내성적이고 집순이 같은 기질을 갖게 된 지수는 점점 이성에게 마음을 열어갔고, 여명은 다소 늦게 불을 지피지만 결국 솔직해지는 용기를 보였다. 이들의 변화는 연애 성공 여부보다 조금 더 나은 ‘나’로 나아가는 성장 서사의 힘을 보여준다. 한편 첫 연애 상대의 나이와 직업, 환경이 이들에게도 큰 영향이 될까? ‘메기남’ 승찬의 직업이 의사라는 사실을 듣자 재윤은 “의사는 힘든데”라고 말한다. 재윤의 반응에 대해 조욱형 PD는 출연자 인터뷰 비하인드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정작 재윤이 좋아하는 여명 씨는 직업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어요. 출연자를 모집할 때도 직업적 장점을 고려했으나, 20대 여성들은 직업에 대한 편견이 아예 없더라고요. 오히려 대화가 잘되고, 매너가 좋고,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남자를 높게 평가했죠.” 감정과 연결을 기준으로 선택하겠다는 선언. 연애 시장에서 스펙이 당연한 평가항목이 된 시대에 이건 관계의 순수성을 되살리는 강력한 태도다! 이런 시선은 꽤 오랜만이었고, 오래가는 관계의 가장 단단한 토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연애 성공담이 아니다. 모두가 실패했고, 주저했고, 그래서 조금씩 변해갔다. 프로그램은 그 ‘조금씩’을 집요하게 기록한다. 성숙은 한 번의 고백이나 사진으로 완성되는 이벤트가 아니라, 반복된 어색함과 작은 용기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배우는 교감의 기술로 이뤄지는 것 아닐까? “모솔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의외라며 놀란다. 이 모습을 즐기며 자존감을 채우기 위해 일부러 말할 때도 있다”는 재윤의 말과 “솔직히 말해 부모님은 내가 어찌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자식도 내가 선택할 수 없고 하늘에 맡겨서 태어나는 것인데, 남자만큼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거”라는 민홍의 말처럼 모솔은 부끄러운 꼬리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지나온 가장 인간적인 성장의 출발점이자 더 행복한 삶을 위한 준비 과정임을 보여준다. 내가 이토록 순수하고 미숙한 감정을 꺼내본 순간은 언제였을까? 언젠가 이 감정을 다시 느껴볼 수 있을까? 이들의 미숙함 속에서 내 과거를 발견하고, 그 시절의 나를 조금 더 다정하게 바라보게 됐다. 사랑은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서툴러도 시작하는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 또한 ‘사랑스럽게’ 증명하며!
Credit
- 에디터 정소진
- 타이포그래피 STUDIO VUE
엘르 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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