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2' 심성철 셰프가 맨하튼의 스테이크 전투에 뛰어든 이유
맨해튼의 모던 한식 파인 다이닝, 그 전장의 한가운데서 심성철은 가장 직관적인 승부수를 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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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흑백요리사2'에 참여한 백수저 심성철 셰프 인터뷰
- 심성철 셰프가 뉴욕에서 체감한 한식 파인 다이닝의 인기
- 맨해튼의 파인 다이닝에서 일한 경험과 크게 배운 한 가지
- '스테이크의 성지' 뉴욕에서 스테이크 하우스를 오픈하기로 결심한 이유
지금 뉴욕의 K푸드 풍경은 어떤가요? 특히 한식 파인 다이닝의 인기가 뜨겁다는데, 아무래도 최전선에서 느끼고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 음식은 지금 어떤 때보다 ‘핫’한 퀴진으로 여겨집니다. 이국적인 음식이 아니라 주류 반열에 들어서기 시작했죠. ‘아시아 푸드’가 아니라 그냥 ‘코리언 푸드’로 인지되기 시작했으니까요. 미국 내에 다양하게 얽힌 식문화 중 하나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아요.
여전히 한국 음식으로 불고기나 비빔밥을 떠올리나요
20년 전에는 그랬죠. 불고기와 갈비, 김치 정도만 알려졌으니까요. 지금은 K컬처 상승세와 맞물려 K푸드도 하나의 장르로 파이가 커지고 있습니다. 맨해튼 내 한식 기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으로 ‘정식당’이 유일했다면, 지금은 점점 저희 같은 15~20년 경력의 셰프들을 주축으로 완성도 있는 업장이 자리를 키워가고 있습니다. 현지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가능성을 인정 받으면서요. 한식당 자체는 원래도 많았습니다만 파인 다이닝 신은 테이스팅 코스처럼 한식을 발전시켜 하나의 전략적인 컨셉트를 완성해 냈죠. <미쉐린 가이드> 1스타의 ‘꼬치(Kochi)’, ‘마리(Mari)’, ‘오이지 미(Oiji Mi)’ 그리고 2스타의 ‘주옥(Joo Ok)’ 등 각자 개성으로 만든 식당들이 K파인 다이닝을 새롭게 개척해 나가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해요.
‘꼬치’의 대표 메뉴 문어 튀김.
2019년, 맨해튼의 헬스 키친에 9코스 꼬치 컨셉트의 ‘꼬치’를 열며 셰프님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뉴욕 타임스>와 <미쉐린 가이드>가 ‘뉴욕 한식 파인 다이닝을 재정의한 셰프 군단’ 중 한 명으로 소개할 만큼 대담하고 호기로운 전략이었습니다. 그때 왜 ‘꼬치’였나요
원래 ‘쿠시야’라는 일식당을 열 계획이었어요. 일식당에서 오래 일했고, 비즈니스 리스크 측면에서 가장 망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 일식이었으니까요. 그러다 어느 날 동갑내기 아내가 말하더군요. “네가 잘하는 게 한식인데, 왜 일본식으로 가냐?”(웃음) 이미 어느 정도 플랜이 나온 상태였는데, 즉시 방향을 바꿨습니다. 맞는 말이었거든요. ‘그래, 한식 테이스팅 코스를 만들자.’ 이틀만에 결정하고 메뉴를 완성했어요. 당시에는 테이스팅 코스가 주 트렌드였고, 소비자에게 가장 익숙한 형태였지만, 한식 테이스팅은 드물었습니다. 가격도 보통 200~300달러지만 우리는 75달러짜리 코스를 만들어 승부하기로 했죠.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단 30석 규모에, 매일 80~90명이 찾아왔어요. 잘 되던 찰나 팬데믹이 덮쳐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미쉐린 가이드> 1스타를 받고 소비자와 업계 인정을 받아 살아남았습니다.
한식 파인 다이닝 ‘마리’와 ‘구이(Gui)’가 뒤이어 생겨납니다. 심플하지만 명료한 이름인데요. 보통 해외 한식당은 이런 방식으로 이름을 짓더군요
‘마리’는 ‘꼬치’를 열기 전부터 구상한 식당이었습니다. 한국에는 싸 먹는 식문화가 있잖아요. 일식 레스토랑에서 오래 일하며 오마카세가 파인 다이닝을 관통하는 하나의 스타일이 될 수 있다는 걸 체감했고 한식에서도 김과 채소, 무 같은 쌈 문화에서 힌트를 얻어 한 입에 즐길 수 있는 바이트로 구성한 오마카세 스타일을 전략적으로 선보이고 싶었습니다. ‘꼬치’가 그러하듯 직설적이고 원초적인 이름을 택했고요. ‘구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고깃집 혹은 스테이크 하우스를 떠올릴 수 있도록 레스토랑의 정체성을 이름 자체로 명확하게 드러내고 싶었달까요.
2025년에 오픈한 ‘구이’는 한식의 풍미가 결합된 미국 정통 스테이크를 표방합니다. 결국 셰프님의 궁극적인 승부처는 고기인가 싶었습니다(웃음)
미국에 스테이크 하우스를 오픈한다는 건 오랜 숙원이었어요. 뉴욕에서 20년 넘게 일하고 타임스퀘어 근처를 오가며 늘 스테이크 하우스를 열고 싶다는 꿈을 꿨었죠. 그러다 꼬치, 마리를 운영하며 점점 ‘간땡이’가 커졌고, 결국 여기까지 왔으면 한번 부딪혀보자는 마음으로 끝까지 몰아붙였습니다. 물론 무모했습니다(웃음). 준비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금 부담도 커졌고, 그로 인한 타격도 컸고요. 그럼에도 ‘구이’를 기획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정통 아메리카 스테이크 하우스의 클래식한 포맷을 그대로 가져가되, 한국인이라는 뿌리를 녹여보고 싶었거든요. 사실 ‘코리언 스테이크 하우스’라는 장르 자체가 없지 않습니까. 고기를 직접 드라이에이징하고, 장작불로 구워내는 방식으로 스테이크라는 음식의 기본기를 탄탄히 하면서 비빔밥과 김치볶음밥, 순두부찌개 같은 메뉴를 사이드로 더했습니다. 초반에는 스테이크 하우스인데 어설프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제 방식대로 밀고 갔어요.
코트와 셔츠는 모두 Ami.
‘스테이크 성지’에서 호기를 부린 것 치고는 무모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었습니다. 잘해오던 장르가 명확히 있었으니까요
스테이크 하우스에 대한 뉴욕 로컬들의 자부심이 대단하죠. ‘울프강’ ‘킨’ ‘피터 루거’까지 미국, 특히 뉴욕에서는 경쟁이 치열한 장르이기도 하고요. 수많은 ‘난다 긴다’ 하는 셰프들 사이에서 단순히 자부심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테이크 하우스가 곧 자존심인 뉴욕에서 제 이름을 걸고 제대로 된 승부를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구이’는 <뉴욕 타임즈>에서 새로운 트렌드를 이끄는 스테이크 하우스로 소개되었고, <Eater>에 뉴욕 베스트 스테이크 하우스 리스트에도 올랐습니다. 뒤이어 ‘화로(Hwaro)’를 오픈했습니다. 플레이트나 커트러리 모두 작가들의 작품과 커스텀으로 제작하는 데 1억 원 넘게 들었어요. 1년 반 동안 어마어마한 렌털 비용도 계속 내야 했죠. 죽기 살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점점 입지를 굳히고 있어요. ‘맨해튼 베스트 뉴 레스토랑’ 리스트에도 오르고, 인정받고 있는 것 같아 감사할 따름입니다.
각국 미식의 중심지이자 ‘멜팅 팟’에서 한식을 자리 잡게 하는 데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이었을까요
요리사로서 맛있는 음식을 크리에이티브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손님에게 어필해서 이 비즈니스가 성공적으로 운영되게 하는 게 목표죠. 실패했을 때 한식 파인 다이닝이 타격을 있을 수도 있고요. 한식을 하는 셰프로서 파인 다이닝이 계속 문을 닫는 상황이라면, 문제가 있거든요. ‘한식 별거 아니네’ ‘트렌드가 아닌가 보다’ 이럴 수도 있죠. 뉴요커가 계속 찾는 한식 파인 다이닝 비즈니스 모델을 만드는 것이 모험이었습니다. 이제 실력 있는 셰프들이 이쪽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러니 업장이 오픈하면 “한식이 될까?”라는 고민보다 이 셰프가 어떤 기획과 의도, 컨셉트로 오픈할지 기대하는 상황으로 가고 있습니다.
‘꼬치’의 회 코스.
셰프님의 요리 스타일을 스스로 정의해본다면
직설적. 입에 착 달라붙는 맛있는 음식을 하는 것이 목표니까요.직관적으로 연결되는 맛을 좋아합니다.
뉴요커로서 삶은 어떻습니까
불안함과 꿈, 두 감정이 공존하는 도시죠.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절실함이 결국 저를 만드는 것 같습니다. 가장 경쟁이 치열하고, 가장 빠르게 돌아가는 곳이니까요. 매일 뛰지 않으면 버텨내기 어렵고, 더 성장하려면 스스로 계속 채찍질하며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해요.
처음 요리의 미학을 일깨워준 건 어떤 사건이었나요? 1980년대 광주, 대가족 밥상을 어머님과 함께 책임지며 수십 명 분량의 음식을 준비하셨다죠
4형제 중 막내인데, 형님들과 나이 차이가 꽤 나요. 대가족이라 어머니는 아침· 점심· 저녁은 물론 도시락을 많게는 20개씩 싸셨습니다. 저도 어머니를 돕다 자연스럽게 주방에 익숙해졌죠. 어머니는 이 말도 안 되는 일에 짜증을 내거나 억지로 하지 않았습니다. 식구들이 맛있게 먹는 걸 보면서 즐거워했어요. 그런 마음을 어릴 때부터 몸으로 익혔죠. 그래서 ‘셰프가 되고 싶다’기보다 자연스럽게 ‘요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화이트 셔츠는 Sulvam. 팬츠는 Ami.
국내 호텔 주방에서 설거지와 조리 보조를 하다, 2005년 1월, 뉴욕으로 건너가 CIA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미국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왜 그곳으로 향했습니까
1999년, 호텔조리과에 들어갔어요. 이후 뷔페나 웨딩 홀에서 일하고 호텔에서 인턴십도 했죠. 근데 ‘더’ 배우고 싶은 거예요. 당시 미국 요리사이자 방송인 앤서니 보데인의 베스트셀러 <키친 컨피덴셜>을 정말 재밌게 읽었는데, 거기서 그 셰프님이 다니던 CIA요리학교에 관해 알게 됐죠. 한 번 가보고 싶더라고요. 무작정 유타로 3개월간 어학연수를 갔고, 일본인 룸메이트가 이 학교에 대해 자세히 알려줬어요. 부모님께 학비만 내달라고 사정했습니다. 생활비를 벌면서 일단 합격통지서를 받았고, 2005년 1월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면서 뉴욕에서 새로운 챕터가 시작됐죠.
맨해튼의 <미쉐린 가이드> 3스타 레스토랑 ‘르 버나딘(Le Bernardin)’ ‘고든 램지(Gordon Ramsay)’ ‘모리모토(Morimoto)’ 등 내로라하는 파인 다이닝과 일식당에서 수련했고 ‘퍼 셰(Per Se)’에 최초의 한국인 셰프로 일한 경험은 엄청나요. 이때 ‘맛’에 대해 가장 크게 배운 한 가지는
맛은 셰프의 경험과 재료에 대한 자세를 그대로 보여주는 결과물입니다. 똑같은 재료가 주어지더라도 테크닉과 경험이 없으면, 어떤 음식이 나올지 모르거든요. ‘프렌치 론드리’와 ‘퍼 세’를 보유한 토머스 켈러 그룹에서 일하면서 가장 크게 배운 건 맛이 전부가 아니라는 겁니다. 맛은 새로움을 추구하면서 완벽해야 하는 기본일 뿐 서비스 하나라도 어떻게 놓을지, 코스마다 몇 분 타이밍을 줄지, 중복되는 재료 없이 소스나 플레이팅, 플레이트의 온도, 텍스처까지 완벽하게 어필할 수 있는 테크닉과 서비스가 하나로 어우러져 미친 경험을 하게 해주거든요. 새롭고 지속적인 요리를 만들면서 한 치의 오차도 용납되지 않는 포맷 앞에서 500달러를 주고 ‘베리 굿(Very Good)’을 외치게 하는 태도를 그곳에서 배웠습니다.
<흑백요리사2>에서는 오래 보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25년간 요리하면서 경연 자체를 해본 적이 없어요(웃음). 그래도 열정 넘치는 최고의 셰프님들과 겨루면 하나라도 배우지 않을까 싶어 참여했고, 역시나 많은 걸 배웠죠. 진정성을 크게 느꼈습니다.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 조리대 앞에 섰다는 것이 보였어요. 시차도 있는 데다 한국에 거주하지 않으니까 재료 수급 등 쉬운 게 하나도 없었지만 나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됐죠.
셰프님이 제일 좋아하는 식재료는
마늘입니다. 구수함이랄까 단맛이랄까, 이런 게 너무 좋죠. 조리 방식에 따라 맛이 달라지잖아요. 저희는 마늘을 몇 박스씩 사서 오일을 만들어요. 갈색 빛이 나게끔 튀기듯이 기름을 만들고, 그걸 걸러내 모든 소스에 기본 베이스로 넣어요. 천연 조미료가 되는 거죠.
요리는 삶의 어떤 존재인가요
지금 이 순간에도 생각합니다. 음식 50%, 운영에 대해 30% 생각해요. 특히 ‘화로’는 오픈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압박이 있어요. 거의 잠을 못 잘 정도로 고민하죠. 하지만 에너지와 열정은 넘칩니다. 요리는 누가 시키면 절대 못해요. 13시간씩 주방에서, 일상에서, 지금까지도 “너 이거 해” 하면 누가 하겠어요? 애정이 아니면, 절대 못하죠!
Credit
- 에디터 전혜진 · 정소진
- 사진가 곽기곤 · Christophe Coënon
- 스타일리스트 이정현
- 헤어메이크업 아티스트 서채원 · 이현정 · 최경민 · 정지은
- 아트 디자이너 정혜림 · 민홍주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
2026 봄 필수템은 이겁니다
옷 얇아지기 전 미리 준비하세요, 패션·뷰티 힌트는 엘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