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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요리사 열풍 이후 올해의 미식 트렌드 12가지

2026년의 미식의 명장면 미리 보기. 지금 식탁에서 감지되는 변화의 신호와 다가올 맛에 대한 단서들.

프로필 by 이경진 2026.02.21

흑쏘공! <흑백요리사>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그래서 어떤 간장이 좋아요?” 최근 SNS 타임라인이 요동쳤다. 사찰 음식의 대가 선재 스님의 과거 간장 관련 인터뷰가 재조명되면서부터다. 미디어와 전문가가 전통 한식 간장의 중요성을 아무리 설파해도 미지근했던 대중이 반응하기 시작한 것. 개인적으로 넷플릭스 시리즈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하 <흑백요리사>에서 파생된 현상 중 가장 긍정적이고, 가장 충격적이었다. 거론된 산분해 간장의 건강상 유해함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지만 ‘맛’을 찾는 시대에 일률화된 산분해 간장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시장이 내심 불편했던 차에 대중에게 영향력 있는 인물의 한 마디에 미치는 파급력을 기분 좋게 체감했다. 이 장면이 의미하는 것은 대중이 음식을 내는 ‘사람’에게 열광한다는 점이다. 미식 산업이 엔터테인먼트의 문법을 입고 팬덤 산업으로 진화했달까. 이 팬덤은 곧장 예약 전쟁을 양산했다. 시청자들에게 소위 말하는 ‘원픽’ 셰프의 식당을 찾는 것은 일종의 성지 순례가 됐고, 예약 플랫폼에서는 ‘흑백요리사 출연 셰프’ 배지가 현시점에서는 <미쉐린 가이드>의 별보다 더 빛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이 침체된 외식업계에 어떤 활력을 불어넣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덧붙여 식당이라는 공간의 수용 능력 한계는 셰프를 주방 밖으로 꺼내 확장 가능한 IP로 진화시키는 기폭제가 됐다. ‘셰프 IP’의 파급력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무대는 간편식 시장. <흑백요리사> 시즌1 방송 직후 출시된 나폴리 맛피아의 ‘밤 티라미수’는 무려 250만 개가 팔려나갔고, 에드워드 리와 맘스터치의 협업 메뉴 역시 뜨거운 인기를 구가하며 2탄까지 이어졌다. 셰프의 이름 그 자체로 브랜드이자 흥행 보증수표임을 복기한 유통업계는 시즌2에서는 우승자를 기다리지 않았다. 팬덤 문법 안에서는 누가 우승하느냐보다 누가 스토리의 중심에 있느냐가 중요하니까. 우승자가 발표되기 전부터 스타벅스는 유용욱 소장과 협업한 샌드위치를, 이마트24는 손종원 셰프와 함께 패밀리 밀 컨셉트의 간편식을 선보이는 등 속도전이 붙은 이유다. <흑백요리사>는 요리경연대회를 넘어섰다. 셰프라는 아티스트를 탄생시키는 연예기획사이자, 그들을 강력한 IP로 성장시켜 침체된 내수시장을 움직이는 거대한 마케팅 플랫폼이 됐다. 사람들은 이제 배를 채우기 위해 음식을 먹지 않는다. 셰프의 세계관을 맛보고, 예약 전쟁에 참전하며, 한 끼를 때우는 편의점에서조차 셰프의 흔적을 찾는다.



단백질 전성시대

‘24g’. 편의점에서 제품명보다 더 굵고 큰 폰트로 적힌 숫자를 발견한다. 닭 가슴살도, 두부도 아니다. 과자다. 건강과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과자 등의 스낵류에서조차 단백질 함량을 따지는 시대. 식품 기업에 웰니스가 선택 가능한 틈새시장이 아니라, 반드시 갖춰야 하는 관문이 된 지금의 슈퍼스타를 꼽자면 단연 단백질이다. 다소 과열된 단백질 집착 현상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전망이다. 최근 발표된 미국 정책이 이 불길에 기름을 부었다. 2026년 1월 초, 미국 백악관과 보건복지부는 ‘2025~2030 미국인을 위한 식생활 지침’을 발표하며 고단백 식단으로의 회귀를 선언했다. 기존 체중 1kg당 0.8g이었던 단백질 섭취 권장량을 1.2~1.6으로 최대 2배가량 대폭 상향하고, 매 끼니 단백질을 최우선으로 섭취하라는 지침을 내린 것. 여전히 글로벌 스탠더드로 통하는 미국 정부의 이 같은 발표는 전 세계 식품 기업에 가장 확실한 명분이 돼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건 단순히 ‘얼마나 많이’ 먹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양질의 단백질’을 섭취하는 것이 본질이라는 점이다. <트렌드 코리아 2026>은 이런 맥락에서 ‘건강지능(Health Intelligence, HQ)’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했다. IQ와 EQ의 시대를 지나 이제는 건강 정보를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내 몸에 맞게 적용하는, HQ가 높은 소비자가 시장을 주도할 것이다. 포장지에 적힌 큰 숫자에 맹목적으로 반응하기보다 단백질의 출처와 질을 물어야 할 것.



내 곁에 AI 주방 가전

국내외 트렌드 리포트에서 몇 년째 빠지지 않는 화두는 단연 AI다. 하지만 AI로 개발한 레서피나 빅 데이터로 개발한 신제품은 소비자 입장에서 별 감흥이 없다. 결과물이 개인에게 뭘 해주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체감의 간극을 가장 눈에 띄게 메우고 있는 것은 가전 업계다. 실례로 2026년 1월 6일부터 9일까지 개최된 세계 최대 가전·IT 전시회 ‘CES 2026’에서 LG전자는 AI가 추상적인 마케팅 용어가 아니라 주방의 확실한 솔루션임을 보여줬다. 거대언어모델(LLM)이 적용된 냉장고는 “고기를 일주일 정도 보관하고 싶다”는 물음에 최적의 보관 모두를 스스로 설정하고 제안한다. 내부 카메라가 식재료 입출고를 실시간으로 추적해 레서피를 짜주는 건 기본. 고메 AI 오븐은 내부 카메라가 재료를 식별해 80여 가지 메뉴 중 최적의 레서피를 찾아내는가 하면, 빵이 가장 맛있게 구워지는 순간을 포착해 실패를 원천 차단한다. 주방을 노동 공간에서 교감과 관리의 공간으로 재편성하는 것. 이것이 소비자가 가장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는, 피부에 와닿는 AI 미식의 현주소가 아닐까.



건강한 한 그릇 요리

통계청이 지난해 12월에 발표한 ‘장래가구추계’는 외식 시장의 예고된 지각변동을 ‘확증’해 줬다. 국내 1인 가구 수는 2025년 사상 처음으로 800만 가구를 돌파했고, 2026년에는 836만 가구에 육박할 전망이다. 이런 인구 구조의 변화는 현대인의 식탁을 ‘펼쳐놓는 것’에서 ‘담아내는 것’으로 재편하고 있다. 혼밥에 한 그릇 요리만큼 기특한 존재는 없으니까 말이다. 이 흐름은 그릇을 넘어 컵으로 이동하며 극강의 기동성도 확보했다. 지난여름 컵빙수로 시작된 유행은 냉면, 육회, 마라탕 등 메뉴를 불문하고 컵에 담겨 걸어 다니는 식탁을 구현했다. 글로벌 트렌드인 ‘하이-로’ 미학, RMR 트렌드까지 적용된다면 앞으로 컵 하나에 <미슐랭 가이드> 스타 셰프의 생면 파스타나 최상급 스테이크가 담기지 말란 법 있을까. 향후 기존의 2~3인분 메뉴를 단순히 양만 줄여 파는 소극적 대응을 넘어 건강하고 차별화된 한 그릇을 만들어내는 역량이 핵심 경쟁력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전통시장의 힙스터들

지난해 초, 별안간 광장시장에서 테킬라 파티가 벌어졌다. 좌판을 깔고 플라스틱 의자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음식을 먹는 모습은 여느 노점과 다를 바 없지만, 테이블에는 타코와 테킬라가 놓였다. 테킬라 브랜드 돈훌리오와 ‘라까예’ 진우범 셰프의 협업 팝업은 우리가 흔히 ‘정’이나 덤, 전통 같은 단어로 수식하던 재래시장의 모습을 트렌디하고 ‘힙’한 무드로 바꿔놓았다. 시장 내 폐허 공간을 개조한 와인 바나 카페 등도 이제 낯선 풍경은 아니다. 젊은 감각이 로컬의 유산과 호흡하며 만들어낸 신선한 불협화음이 사람들의 발걸음을 시장 안쪽 깊숙한 곳으로 이끌고 있다. 오래된 것을 촌스러운 것이 아닌 ‘힙’한 레트로로 받아들이는 젊은 층이 시장으로 모여들고, 그들을 겨냥한 젊은 상인들이 터전을 옮기며 비롯된 현상이다. 전통시장은 실험적인 컨셉트를 테스트하기에도 좋은 무대다. 업계에서는 이미 전통시장을 ‘포스트 성수’로 지목하고 있다. 인위적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시장 특유의 날것 바이브가 살아 있기 때문에 새로운 팝업 스토어의 무대로 낙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트렌드를 읽고 싶다면 전통시장으로 가도 좋겠다.



로컬의 맛, 컬리너리 칵테일

‘안동찜닭’ ‘냉면’ ‘소이 캐러멜’ ‘카프레제’…. 음식 이름이 아니다. 잔에 담겨 나오는, 지금 한국의 바에서 만나볼 수 있는 칵테일 이름이다. 과거 세이보리 칵테일이 감칠맛에 집중하거나 유명한 음식 맛을 흉내 내는 신기한 이벤트에 머물렀다면, 지금의 컬리너리 칵테일은 깊이가 다르다. 바와 주방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칵테일 한 잔이 ‘마시는 요리’로 진화하고 있다. 바 자체적으로 회전증류기, 원심분리기 등으로 식재료의 물성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면서 이 흐름이 더욱 활발해졌다. 이런 흐름은 로컬리티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결과물이다. 특히 아시아 바 신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위스키나 진, 테킬라 같은 서구권의 전통적 기주를 생산하지 않는 나라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확실한 비기가 바로 로컬 식재료이기 때문이다. 다이닝 신에서 시작된 로컬 식재료에 대한 탐구가 바 신으로 옮겨 붙으며 칵테일은 단순한 혼합주를 넘어 지역의 테루아를 표현하는 미식의 매개체이자 바의 정체성을 표출하는 방식이 됐다. 참기름과 고추장, 된장, 김치까지. 이제는 칵테일이 될 수 없는 재료가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힘이 센 바이럴 플레이버

기업의 생산 라인이 가동되는 프로세스는 식품연구원들이 트렌드를 분석하고 수십 번의 관능평가를 거쳐 제품을 내놓은 뒤 소비자가 진열된 상품을 선택하는, 전통적인 톱다운(Top-down) 방식이었다. 이 견고한 공식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 것은 틱톡과 인스타그램 등의 개인 미디어 채널이다. 말차의 재부상 역시 이런 바이럴의 산물이다. 미국 틱톡에서 카일리 제너 등 셀럽들이 마시는 말차 스무디가 ‘힙’한 라이프스타일의 상징이 되며 시작된 유행은 한국으로 넘어왔고, 카페 프랜차이즈와 제과 업체들은 앞다퉈 말차 파우더를 추가하거나 함량을 높인 라인업을 내놓으며 즉각 반응했다. 피스타치오도 빼놓을 수 없다. 사실 피스타치오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니아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나 가끔 선택받던 이 견과류가 순식간에 딸기나 초콜릿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메이저 장르로 격상된 것도 다름 아닌 SNS라는 강력한 기폭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2024년과 2025년을 강타한 ‘두바이 초콜릿’ 열풍에 이어 ‘두쫀쿠’ 열풍도 같은 도화선이다. 피스타치오 크림 언급 양은 틱톡에서 전년 대비 644.8%, 구글에서는 66.8% 증가했고, 대중적 열광은 기업의 파이프라인을 강제로 움직였다. 애초에 주력 상품군이 아니었던 피스타치오가 시장을 집어삼키자, 급하게 원물을 확보하고 피스타치오 라테·샌드·케이크 등 파생 상품을 쏟아냈다. 바이럴이 곧 제품기획의 시작이 되는 시대다. SNS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바이럴 플레이버는 식음료 시장에 계속해서 새로운 불씨를 던질 것이다.



취기 빼고 마시기, 저•무알코올

2년여 전, 세계 최대 규모의 주류 기업 디아지오가 무 알코올 브랜드 ‘리추얼 제로 프루프’를 인수했다. 국내외의 다양한 리서치 기관에서 그보다 훨씬 전부터 꾸준히 저·무알코올 트렌드를 거론해 왔지만, 전 세계 위스키 판매 부동의 1위인 ‘조니 워커’를 판매하는 회사의 이 역설적인 행보가 가장 큰 한 방으로 다가왔다.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이 정도 규모의 공룡 기업이 미래에 돈이 되지 않는 일에 움직일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옳았다. “술은 마시고 싶지만, 취하고 싶지는 않다.” 모순적이라고 여겨졌던 이 욕망이 주류 시장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됐다. 임산부나 운전자를 위한 대체재가 아니다. 취하지 않을 자유 속에서 술자리 무드는 즐기고 싶은 이들을 위한 가장 세련된 기호 식품으로 자리 잡았고, 기업들은 이 똑똑한 이중성을 비즈니스 모델로 흡수했다. 국내에서는 특히 맥주 시장이 뜨겁다. 시장조사기관 유로모니터가 국내 저·무알코올 맥주 시장이 2027년 946억 원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 예견한 가운데 카스 제로, 하이트 제로 등 국내 대표 대기업 맥주 양대 산맥이 제로 시장에서도 승승장구 중이다. 바 신에서는 기존 클래식 칵테일에서 알코올만 빼고 소다를 조합하던 것에서 자체 레서피로 개발한 논알코올 칵테일을 어엿한 한 잔으로 제공하는 곳이 눈에 띄게 늘었다. 다이닝 신은 해외에 비해 다소 더디지만, 논알코올 페어링에 걸음마를 떼고 있는 양상이다. 대표적으로 ‘주052’의 심재현 소믈리에는 밀크 워싱(재료에 포함된 산이 단백질과 만나 응고되는 원리를 이용해 액체를 투명화하는 기법)한 사과 주스, 버터에 인퓨징한 포도 주스 등 직접 개발한 일곱 가지의 논알코올 음료 페어링을 선보이고 있다. 주류(Drink) 시장의 새로운 주류(Mainstream)가 되고 있는 건 분명한데, 저렴한 가격의 대기업 제품, 공간과 분위기를 함께 소비하는 바나 레스토랑 외에 크래프트 논알코올 제품의 가격 장벽을 소비자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취기가 아닌, 오직 미식적 가치만으로 지갑을 열게 하는 것. 그것이 2026년 논알코올 시장에 남겨진 과제다.



글로벌 장르가 된 한식

이제 한식은 김치찌개나 비빔밥 같은 특정 메뉴를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다. 전 세계 미식 신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맛의 스타일을 정의하는 하나의 장르가 됐다. ‘K’라는 수식어는 더 이상 출신 성분을 묻는 국적이 아니라, 미식 문법을 설명하는 고유명사로 진화했다. 어떤 음식 트렌드가 일시적 유행을 넘어 지속 가능한 문화로 자리 잡았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일상이다. 즉 화려한 파인 다이닝을 넘어 평범한 가정의 일상 식탁에 올랐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2026년, 한식은 바로 이 지점을 통과 중이다. 호기심을 넘어 글로벌 식탁을 점령하고 있다. 이 일상 한가운데에 장(醬)이 있다. 고추장, 쌈장, 된장 등 한식 맛의 근간을 이루는 재료들은 더 이상 한인 마트를 찾아야 살 수 있는 이국적인 식재료가 아니다. 홀푸드 마켓이나 트레이더 조 같은 현지 마트의 소스 코너, 그것도 가장 눈에 잘 띄는 ‘골든 존’에서 쉽게 발견된다. 중요한 것은 쓰임새의 변화다. 글로벌 소비자에게 장은 꼭 한국 요리를 만들 때만 쓰는 재료가 아니다. 햄버거 패티의 느끼함을 잡거나, 파스타 소스에 매운 감칠맛을 더하는 요소로 활용된다. 다이닝 신에서도 서양 요리 문법에 한식 DNA를 이식한 코리언 하이브리드 메뉴가 늘어나고 있다. 2026년 LA에 오픈을 앞두고 있는 셰프 낸시 실버턴(Nancy Silverton)의 레스토랑 ‘라파바’의 메뉴를 예로 들면, 탈리아텔레 파스타를 고추장 버터 소스로 완성하고, 부라타 치즈에 참기름을 뿌려 내는 식이다. 이탤리언 스타 셰프가 한식이라는 재료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자신의 문법으로 소화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한 대접을 받는 단계에서 벗어나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익숙한 도구로 자리 잡아가는 한식. 트렌드라는 불안한 지위를 벗고 글로벌 클래식으로 자리 잡을 날을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올데이 바

‘커피는 낮에, 술은 밤에’라는 이분법이 무너져 내렸다. 해가 지기를 기다려 부어라 마셔라 즐기던 밤의 음주 문화는 저물고, 오후 2시의 햇살 아래 가볍게 술잔을 부딪히거나 늦은 저녁 바에서 에스프레소를 음미하는 올데이 바가 새로운 도시 풍경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보인다. 유럽의 노천카페에서나 보던 유연한 드링크 문화가 서울의 일상에 이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 공간들은 스스로를 카페나 술집이라는 단일 정체성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바리스타와 바텐더가 한 공간에 공존하거나, 1인 다역을 해내며 오픈 시간부터 마감 시간까지 커피와 주류를 제한 없이 제공한다. 스타벅스라는 거대 기업이 이 흐름에 편입한 것은 낮술이 일부의 일탈이 아닌, 대중적인 비즈니스 모델로 정착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스타벅스 리저브 도산은 리저브 전용 칵테일 바 컨셉트인 ‘바 믹사토(Bar Mixato)’를 국내 최초로 도입한 곳으로, 11종의 칵테일 음료를 선보이고 있다. 이토록 시간의 경계가 흐릿해진 배경에는 노동 환경과 음주 인식의 전환이 있다. 재택 근무와 유연 근무제가 보편화되면서 ‘9 to 6’라는 시간표가 헐거워졌고, 노트북을 든 워케이션족에게 한 잔의 낮술은 업무의 윤활유가 되기도 한다. 또 폭음 대신 맛과 향을 음미하는 소버 큐리어스(Sober Curious) 트렌드는 술을 취하기 위한 도구에서 무드를 즐기는 오브제로 변환시켰다.



우지의 화려한 귀환

1989년, 대한민국 식품업계를 뒤집어놓은 ‘우지 파동’. 당시 라면 업계 1위를 다투던 삼양식품이 사용하던 미국산 소기름이 공업용이라는 누명을 쓰면서 특유의 묵직하고 고소한 맛이 식물성 팜유의 가벼움으로 강제 대체되어야 했다. 8년에 걸친 법적 공방 끝에 무죄가 입증됐지만, 대중의 인식 속에 소기름은 이미 기피 대상이 된 이후였다. 2025년 말, 이 비운의 기름이 화려하게 귀환했다. 우지 파동 이전의 맛을 복원한 제품 ‘삼양 1963’이 향수와 호기심을 자극했고, 한 달 만에 누적 판매 700만 개를 돌파했다. 사람들은 이제 우지를 라면 국물의 깊이를 결정짓는 ‘치트키’로 인식하며 열광했다. 이런 우지 르네상스는 글로벌 트렌드와도 맞닿아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최근 가공된 식물성 씨앗 기름을 거부하고, 천연 지방인 우지를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뉴욕의 버거 전문점들이 감자튀김을 다시 소기름에 튀겨내며 ‘이것이 진짜 감자튀김의 맛’이라고 마케팅한다.



원초적 기술, 우드 파이어와 발효

<미슐랭 가이드> 심사위원들이 꼽은 ‘2026년 빅 푸드 트렌드’에 흥미로운 키워드가 등장했다. 바로 우드 파이어와 발효·숙성이다. 냉정하게 말해 두 키워드는 새롭게 떠오르는 라이징 스타가 아니다. 2020년 전후 다이닝 신을 이미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을 때를 생각하면 이제는 트렌드라기보다 다이닝 주방을 지탱하는 견고한 조리법으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보는 게 옳다. 그럼에도 권위 있는 미식 안내서로 꼽히는 <미슐랭 가이드>의 호명을 그냥 지나치기는 어렵다. 해답의 실마리를 이노바 마켓 인사이트, 민텔 등 글로벌 트렌드 조사 기관의 분석에서 찾아봤다. 이들은 2026년의 핵심 화두로 ‘전통의 부활’을 꼽으며 이렇게 설명한다. “불안정한 시대에 소비자는 전통에서 진정성을 찾는다.” AI가 모든 것을 생성하고,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 소비자는 역설적으로 인류가 오랫동안 기대어온 변하지 않는 가치나 오래된 방식에서 심리적 안정을 찾는다는 것.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 미식의 원초적 기술은 충분히 재조명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셰프들이 장작불을 선택한 이유는 가스나 전기가 흉내 낼 수 없는 고유의 풍미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불의 세기를 조절해 재료의 겉면을 태우듯 익혀 기분 좋은 쌉싸래함을 더하거나, 장작 연기를 소금이나 후추 같은 조미료처럼 사용한다. 스테이크를 넘어 채소, 해산물 등 모든 식재료에 접목하는 것은 물론이다. 꼭 우드 파이어 컨셉트를 전면에 내세우는 곳이 아니더라도 주방 한 쪽에 작은 화로를 두고 직화, 숯불, 훈연 등을 하는 방식은 보편적 문법이 됐다. 장작불이 열의 기술이라면, 발효는 시간의 기술이다. 전통적으로 발효가 식재료 보존 수단이라면, 현대는 복합적인 풍미를 설계하고, 나아가 주방의 윤리적 과제인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하는 기술로 정착했다. 셰프들은 미생물을 이용한 단백질 분해 과정을 통해 소금이나 설탕 등이 도달하지 못한 다른 영역의 감칠맛을 끌어낸다. 과일이나 채소를 소금에 절이는 락토 발효로 둥글고 우아한 산미를 소스에 입히거나, 쌀과 보리에 띄운 누룩으로 육류를 숙성해 치즈 같은 짙은 풍미를 더하기도 한다. 다듬고 남은 채소 껍질이나 육수를 내고 남은 고기 혹은 시장에서 외형 등의 이유로 상품성이 떨어지는 식재료 등 버려지던 것들을 액젓이나 장으로 재탄생시키는 업사이클링 도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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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글 장새별
  • 아트 디자이너 김려은
  • 디지털 디자이너 김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