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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인 감독의 베를린영화제 가는 길

국제영화제라는 거대한 장면에 신신한 이름이 더해졌다. 지금 막 자신과 타인의 세계에 닿은 여성감독 4인과 그들의 첫 장면들. 그 네번째 이야기인 제76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지우러 가는 길'의 유재인 감독.

프로필 by 박찬 2026.02.16

유재인 일상 관계와 가족이라는 익숙한 구조에서 동시대 변화를 포착해 온 감독이다. 단편영화 <과화만사성>을 통해 과씨 성을 가진 네 남매의 갈등을 그리며, 비혼과 가족 내 역할 변화라는 시대적 징후를 위트 있게 풀어냈고, 이 작품으로 청정원 단편영화상을 수상했다. 장편영화 데뷔작 <지우러 가는 길>은 아동· 청소년의 삶을 조명하는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14플러스’ 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돼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졸업 작품으로는 ‘제너레이션 14플러스’ 부문 최초 진출 사례다.


캐멀 가죽 재킷과 팬츠는 모두 Songzio.

캐멀 가죽 재킷과 팬츠는 모두 Songzio.


첫 장편영화 <지우러 가는 길>이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됐습니다. 첫 국제영화제 출품을 준비하면서 여러 감정을 느낄 것 같아요
감회가 남달라요. 베를린은 저에게 조금 특별한 도시예요. 정확히 10년 전, 영화제를 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여행자 신분으로 베를린에 간 적 있거든요. 그땐 영화 공부를 시작하기 전이라 영화제 기간에도 그냥 거리를 돌아다니기만 했고, 극장 앞에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걸 보면서 ‘아, 영화제가 열리나 보다’ 하고 지나쳤어요. 영화도 한 편도 안봤어요. 이번에는 그때 스쳐 지나갔던 극장 중 한 곳에서 제 영화로 프리미어 상영회를 진행하더라고요.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되게 묘했어요. 그때는 그냥 여행자였는데, 시간이 흘러 같은 장소에 영화감독으로 가게 된 거니까요.


그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 상황이 더 실감 나지 않겠네요
맞아요. 베를린에 다녀온 몇 달 뒤부터 영화 공부를 시작했을 거예요. 그리고 또 하나 기대되는 건 제가 영화를 하기 전에 미술을 전공했는데, 그때 같이 공부했던 친구 중에 지금 베를린에서 유학하고 있는 친구들도 있어요. 이번에 가서 그 친구들도 만나기로 했어요. 그런 소소한 설렘도 함께 섞여 있는 상태예요(웃음).


시간의 간극만큼이나 감동이 클 것 같은데요. <지우러 가는 길>은 어떤 이야기를 다루는영화인가요
담임 선생님과 비밀 연애를 한 고등학생 ‘윤지’가 불법 낙태약을 구매하기 위한 여정을 담은 영화예요. 겉으로는 로드 무비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저는 이 영화가 <지우러 가는 길>이라는 제목처럼 쉽게 지워지지 않는 선택과 감정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길 위에 놓인 시간 속에서 두 인물이 각자의 선택을 통과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어요.


첫 장편임에도 해외에서 먼저 주목받은 점이 인상적이에요. 스스로는 그 이유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장편은 처음이지만 단편 작업을 하면서 해외영화제에 출품한 경험이 없었던 것도 아니거든요. 그때는 거의 반응이 없었어요. 그냥 ‘내 영화는 여기까지겠구나’ 정도로 받아들였죠. 이번에도 해외 출품을 하면서 큰 기대는 없었어요. 장르 영화도 아니고, 인물 중심의 이야기라 해외에서 관심받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해외 관객들이 영화를 집중해서 보는 걸 봤고, 해외 리뷰를 읽어보니 한국 관객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게 조금 놀라웠어요. 이제는 베를린에서 관객들의 반응을 직접 마주해 보고 싶어요.


이번 작품은 어떤 지점에서 시작된 이야기였나요? 처음 떠오른 장면이나 계기가 있었을까요
사실 오랫동안 써와서 잘 기억이 안 나요(웃음). 시나리오만 1년 반 가까이 고쳤거든요. 처음에 쓴 것들이 남아 있는 게 많지 않을 정도로 설정도, 인물도, 에피소드도 거의 다 바뀌었어요. 처음에는 트리트먼트 단계에서 2박 3일짜리 로드 무비로 출발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영화 속 시간이 거의 한 달 정도로 늘어났죠. 그렇다 보니 어떤 ‘명확한 출발점’이 있다기보다 쓰면서 계속 형태가 변해온 이야기예요.


민영은 사라진 선생님 종성의 아내로, 짧게 등장하지만 매번 영화의 공기를 흔드는 인물이다. 윤지와 처음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얼굴이 가려진 채로 드러나는 싸늘한 눈빛이 강한 인상을 남긴다. 개인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캐릭터라 이 복합적인 결을 풀어낼 수 있는 배우가 필요했고, 장선 배우라면 가능하다는 확신이 있었다.

민영은 사라진 선생님 종성의 아내로, 짧게 등장하지만 매번 영화의 공기를 흔드는 인물이다. 윤지와 처음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얼굴이 가려진 채로 드러나는 싸늘한 눈빛이 강한 인상을 남긴다. 개인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캐릭터라 이 복합적인 결을 풀어낼 수 있는 배우가 필요했고, 장선 배우라면 가능하다는 확신이 있었다.


애초에 이 소재로 장편을 완성하겠다는 목표가 분명했던 건 아니었군요
네. 저는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장편 시나리오를 배우는 과정에 입학했는데, 그게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영화를 정식으로 학습하는 시간이었어요. 그때의 목표는 ‘시나리오 한 편을 완성해서 나가자’로 아주 단순했죠. 그래서 이 작품은 일종의 습작처럼 시작된 셈이에요. 이 이야기가 관객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게될 지보다 그냥 제가 관심이 있고, 비교적 잘 아는 이야기를 써보자는 마음이 컸어요. 여자 청소년의 이야기라는 점도 그런 이유였고요. 저 역시 청소년기를 통과해 어른이 됐으니까요.


청소년이라는 인물 설정에 더해 ‘낙태’라는 소재를 전면에 놓은 이유도 궁금해요
영화에 도전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사회적으로 낙태죄 폐지 이슈가 한창이었어요. 저 역시 그 과정을 계속 지켜봤고요. 그런데 법안이 폐지된 이후, 정작 그 이후의 제도나 시스템은 거의 마련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특히 경구로 복용하는 ‘유산 유도제’에 관심이 갔어요. 영화에도 등장하는데, 이 약은 전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고 안전성이 검증된 약물이거든요. 가격도 저렴하고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관련 법안이 없어 허가가 나지 않았고, 그래서 인터넷을 통해 거의 밀수에 가까운 방식으로 유통되고 있어요.


그 불투명한 과정이 사회 문제가 됐겠네요
맞아요. 그 약이 정품인지, 복제 약인지, 아니면 아예 가짜인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그런데 가격은 또 굉장히 비싸게 형성돼 있어요. 이전까지 임신 중단을 다룬 영화들은 대부분 병원을 찾거나 수술해 줄 의사를 찾는 과정이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이 경구 유산 유도제가 등장하면서 완전히 다른 세대의 이야기가 됐어요. 그 변화한 풍경을 영화로 다뤄보고 싶었어요.


<지우러 가는 길>은 교사와 제자 간의 성추행 의혹이라는 사건에서 출발하지만, 곧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죠. 처음부터 이 이야기를 사회극으로 규정하고 싶지는 않았나요
네, 사실 그 사건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많죠. 범죄 문제, 권력관계, 책임 문제까지요. 그런데 제가 다루고 싶었던 건 그게 아니었어요. 윤지가 어떤 관계를 겪었는지보다 그 관계가 끝난 뒤에 이 아이가 어떤 상태로 남는지 그리고 그 상처를 어떻게 통과해 나가는지가 더 중요했어요. 그래서 영화는 진상 규명이나 판단의 방향으로 가지 않고, 상처 이후의 시간을 따라가요.


그런 이유로 영화 속 남성 인물은 거의 보이지 않거나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걸까요
맞아요. 이 영화는 윤지의 첫 사랑이 실패한 이야기이기도 하거든요. 사랑이 끝난 뒤에 남겨진 상태, 남성이 떠난 다음의 세계에 집중했어요. 그 공백이 이 영화의 정서라고 생각해요.


윤지와 경선의 관계가 인상적이에요. 위로와 연대이면서 동시에 서로를 시험하는 듯한 긴장도 느껴졌어요. 두 인물의 관계를어떻게 설정했나요
두 사람은 처음부터 친한 사이가 아니에요. 룸메이트지만 서로에게 별 관심도 없고, 얽히고 싶지 않은 관계였죠. 그런데 어떤 선을 넘는 사건이 생기면서 어쩔 수 없이 가까워져요. 윤지는 임신한 당사자이고, 경선은 돈을 빼앗긴 피해자이기도 한데, 그럼에도 윤지를 도와주는 선택을 하죠. 저는 이 인물을 통해 ‘어떤 이웃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어요. 나에게 나쁜 일이 생길 확률보다 내 주변 누군가에게 나쁜 일이 생길 확률이 더 크잖아요. 그럴 때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경선은 윤지에게 완벽한 사람이지는 않지만,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관계의 결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장면이 있다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중반부에 10~20분 정도 이어지는 윤지와 경선의 극적인 감정 구간이 있어요. 가장 가까워진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다른 국면으로 들어가고, 이후의 선택도 그 사건의 연장선에 놓이게 되죠. 이 장면을 연출할 때 많이 고민한 건 꼭 ‘관객이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할까?’였어요. 윤지의 행동이 관객 입장에서는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일 수도 있거든요. 저는 꼭 이해 가능한 선택을 해야 좋은 주인공이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린 살아가면서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선택을 하기도 하잖아요. 사회가 너무 쉽게 빌런을 만들고, 낙인찍고, 비난하는 방식에 익숙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럼에도 그 선택에 책임질 수 있다면 그 또한 한 사람의 얼굴이라고 믿어요.


윤지와 경선이 '웜뱃' 이야기를 천진하게 주고받는 장면도 인상적이었어요
결국 아직 성장 중인 존재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상황은 무겁지만, 엉뚱한 말 한 마디에 웃을 수 있는 나이잖아요. 영화 전체가 감정적으로 밀도가 높은 편인 만큼, 잠깐이라도 숨 고를 수 있는 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촬영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이 영화의 감정선을 바꾼 경우도 있었나요
예상치 못한 폭설이 내렸어요. 윤지가 눈을 맞으며 터덜터덜 올라가는 장면이 생겼는데, 그때 인물의 상태가 워낙 지치고 고립돼 있었거든요. 눈이라는 물성이 그 감정을 정확하게 안아줬어요. 계획에 없었던 장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영화에 중요한 순간이 됐죠.


이런 감정 밀도를 작업하다 보면 창작자로서 스스로를 다잡는 루틴도 필요할 것 같아요
원래 저는 루틴이랄 게 없는 사람이에요. 일기도 평생 써본 적 없고요. 그런데 이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뭐라도 쓰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야 시작이 덜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세 페이지를 쓰는 ‘모닝 페이지’ 루틴을 시작했어요. 감정을 검열하지 않고 그냥 쓰는 거죠.


영화 내내 투닥거리며 서로를 밀어내던 윤지와 경선이, 처음으로 감정을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장면이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이전과 달리 각자의 방식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스스로 돌아보게 된다.

영화 내내 투닥거리며 서로를 밀어내던 윤지와 경선이, 처음으로 감정을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장면이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이전과 달리 각자의 방식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스스로 돌아보게 된다.


그런 기록들이 이번 작업을 버티게 해줬군요
그랬던 것 같아요. 저는 시나리오 한 편을 완성하겠다는 마음으로 학교에 들어왔는데, 그 시나리오가 장편 제작 대상으로 선정되면서 갑자기 ‘영화를 찍어야 하는 작품’이 돼버린 거예요. 아직 완성됐다고 느끼지 못한 상태에서 촬영 날짜가 점점 다가오는 게 굉장히 부담스러웠어요. 그때 일기를 쓰면서 내가 지금 버려야 할 감정과 붙잡아야 할 마음을 계속 정리했어요. 도서관을 옮겨 다니며 작업한 것도 저만의 리프레시 방식이었고요.


미술을 전공했는데, 영화감독을 꿈꾸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미술을 할 때도 저는 비주얼보다 메시지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러다 비디오 매체를 다뤄보고 싶어 한 워크숍에 참여했는데, 거기서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하나씩 만들었어요. 그중 다큐멘터리가 영화제에 초대되면서 처음으로 영화제라는 공간을 경험했죠. 사람들이 같은 시간에 돈을 내고 극장에 모여 한 이야기를 공유하는 풍경이 굉장히 신기했어요.


그런 경험이 영화를 계속해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어졌군요
네. 그 무렵 넷플릭스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다양한 작품을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했는데,<프리즌 브레이크 Prison Break>(2005)나 <로스트 Lost>(2004) 같은 대표적인 미국 드라마와 시리즈도 못봤던 제가 밤새 이야기를 따라가는 걸 접하고 ‘스토리텔링이 이렇게 강력할 수 있구나’를 체감했어요. 그때부터 픽션이라는 언어가 저에게 잘 맞는다는 확신이 생긴 것 같아요.



창작자로서 영향을 받은 여성 작가나 감독이 있다면
박완서 작가요. 제가 영화를 30대에 시작했는데, 늘 ‘너무 늦은 건 아닐까’라는 불안이 있었어요. 그런데 박완서 작가가 마흔에 데뷔했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됐어요. 이번 영화에 교사의 아내인 ‘민영’이라는 중년 여성이 나오는데, 사실 그 인물이 제일 어려웠어요. 결혼한 여성의 마음을 제가 잘 모르거든요. 그때 박완서 작가의 소설을 많이 읽으면서 도움을 받았어요.


영화가 아니더라도 계속 창작의 테두리에 머물고 싶은지
그럼요. 영화라는 건 큰 비용과 많은 사람의 노동이 필요한 작업이잖아요. 제가 하고 싶다고 언제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데도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내 의지만 있다면 창작의 영역에서 오래 머무는 삶이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갖게 됐어요.


앞으로도 여성 서사를 이어가고 싶나요
네. 여성의 삶에는 아직도 다뤄지지 않은 부조리나 금기가 많은 것 같아요. 요즘 문득 생각하게 된 건 ‘엄마’에 대한 이야기예요. 모성이라는 게 굉장히 복합적인 감정이잖아요. 현실적이면서도 신화처럼 확장될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아직은 아이디어 단계지만, 언젠가는 꼭 다뤄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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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박찬 · 정소진
  • 사진가 장기평
  • 스타일리스트 조해듬
  • 헤어&메이크업 스타일리스트 이현정 · 최경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