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테가 베네타 2026 겨울 컬렉션, 밀라노 건축에서 시작된 쇼
밀라노 건축의 브루탈리즘과 관능성 사이에서 루이스 트로터가 설계한 보테가 베네타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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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기차를 타고 밀라노 시내로 들어오는 길은 언제나 비슷한 장면으로 시작되더군요. 창밖 풍경이 점점 도시의 밀도로 바뀌고 열차가 속도를 줄여 밀라노 첸트랄레역에 가까워질 즈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플랫폼이 아니라 거대한 건물의 외벽입니다. 두꺼운 석재와 직선적 구조가 만들어내는 단단한 파사드, 장식이 거의 없는 거대한 표면. 이렇듯 밀라노의 건축은 군데군데 엄격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20세기 이후 등장한 브루탈리즘 건축은 이러한 인상을 강조합니다. 콘크리트와 기하학적 구조로 이루어진 건물들은 규모감과 물리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며 때로는 권위적인 분위기까지 풍기곤 하죠.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밀라노 건축의 진짜 매력은 거리에서 보이는 외피가 아니라 안쪽에 있습니다. 닫힌 듯 보이는 파사드 뒤로 들어가면 예상치 못한 풍경이 펼쳐지는데요. 아치형 복도로 이어지는 고요한 안뜰과 작은 정원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며 건물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고 말죠. 거리에서는 보이지 않던 부드러운 공간이 건물 내부에 숨겨져 있는 것인데요. 밀라노의 건축 풍경은 종종 이런 방식으로 각인됩니다. 단단한 외관과 그 안쪽에 비밀스럽게 자리한 서정적 혹은 관능적 공간 사이의 대비.
BOTTEGA VENETA
밀라노 패션위크에서 첫 선을 보인 보테가 베네타 2026 겨울 컬렉션에는 이러한 도시의 얼굴이 겹쳐칩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루이스 트로터는 쇼 노트에서 이번 컬렉션을 “브루탈리즘과 관능성의 대화”라고 요약했습니다. 풀어 설명하면, 밀라노에 산재한 브루탈리즘 건축의 외관과 내부가 서로 다른 분위기를 드러내듯, 단단한 구조와 감각적인 표면이 동시에 존재하는 방식으로 컬렉션을 설계한 것입니다. 이러한 접근은 루이스 트로터의 디자인 언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테일러링과도 자연스럽게 맞닿는데요. 루이스 트로터는 구조적인 패턴과 실용적인 테일러링을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습니다.
2026 겨울 컬렉션 쇼는 밀라노 중심부 팔라초 산 페델레에 자리한 보테가 베네타 본사에서 열렸습니다. 들어서자 바닥을 가닥 채운 레드 카펫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더군요. 런웨이는 카펫 위로 길게 이어졌고 양옆으로 일반적인 좌석 대신 작은 의자들이 군집처럼 배치되어 있었죠. 영국의 가구 디자이너 맥스 램이 제작한 설치 작업으로 동일한 형태를 반복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각도를 가진 작은 조각들이 공간을 채웠습니다. 멀리서 보면 마치 객석이 비워진 극장의 무대처럼 보일 법 했는데요. 붉은색 런웨이는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무대처럼 조용한 긴장감을 발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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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모델이 등장했을 때 공간의 조명은 낮게 유지되어 있었고 관객들은 거의 숨을 죽인 듯 그 장면을 응시했죠. 첫 번째 룩은 장식이 거의 없는 블랙 롱코트. 구조적인 어깨와 단단하게 잡힌 실루엣, 머리에 눌러 쓴 니트 비니. 여기에 커다란 목걸이를 더했습니다. 스트리트웨어에서 볼 법한 비니와 하이 주얼리를 연상시키는 목걸이가 하나의 룩 안에서 자연스럽게 공존한 셈인데요. 모델이 손에 쥔 핸드백도 같은 맥락이었을 것입니다. 장식적인 오브제가 아니라 실제 하루를 보내기 위해 필요한 물건들을 담을 법한 크기의 가방이니까요.
이날 런웨이에는 우아한 드레스가 등장하는 한편 패딩 트렌치와 플랫 슈즈도 존재했습니다. 인트레치아토 백 뒤에 컬러 장바구니가 등장한 것도 인상적이었죠. 요컨대 럭셔리와 실용이 공존하는 장면이었달까요. 그제서야 쇼의 방향이 명확해졌습니다. 과장된 패션 이미지가 아닌 도시의 일상에서 출발한 스타일. 그리고 그 일상을 조금 더 정교하게 다듬은 밀라노식 우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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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렉션이 이어지면서 테일러링의 존재감도 점차 뚜렷해졌습니다. 구조적인 어깨를 가진 코트와 재킷, 허리를 따라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실루엣, 몸의 균형을 섬세하게 계산한 비율이 연이어 등장했는데요. 루이스 트로터는 조셉과 라코스테에서 커리어를 쌓는 동안 정교한 테일러링 감각으로 정평이 났죠. 이번 컬렉션에서도 특유의 구조 감각이 발휘됐어요. 루이스 트로터의 옷은 단순히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구조를 설계하는 과정에 가까워 보입니다. 건축가가 건물을 설계하듯 실루엣을 세운 다음 소재와 디테일을 더해 옷의 외형을 완성하는 것인데요. 어깨와 허리, 팔의 움직임까지 고려해 설계된 실루엣은 마치 건축의 프레임처럼 옷의 균형을 만들어요. 단순히 몸을 덮는 옷이 아니라 몸 위에 또 하나의 구조를 세우는 방식처럼 말이죠.
이번 컬렉션에서 등장한 구조적인 코트와 재킷은 그래서 마치 작은 건축물 같습니다. 종종 테일러링 디자이너로 소개되지만 이번 컬렉션을 보면 루이스 트로터의 작업 방식은 오히려 '패션 건축가'라는 표현에 더 가깝게 느껴져요. 구조를 세우고 그 위에 표면을 입힌 다음 형태와 감각을 동시에 설계하는 방식 때문에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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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렉션 중반 이후에는 소재의 질감이 눈에 띄게 풍부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퍼처럼 보이는 텍스처가 꽤 많은 룩에서 등장했는데요. 실제로는 실크와 필 쿠페, 니트, 테크니컬 섬유를 조합한 결과물이더군요. 볼륨과 깊이를 의도해 전통적인 퍼와 비슷한 풍성함을 가지면서도 훨씬 가벼운 움직임을 띠는 데다, 새로운 촉각적 경험을 제안하는 거죠. 요컨대 옷의 진짜 본질은 몸에 닿는 순간 그리고 몸과 함께 움직이는 방식 속에서 비로소 이해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감각적인 실험입니다.
BOTTEGA VEN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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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텍스처는 단순한 장식 이상의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가죽 공예와 직조 기술로 유명한 보테가 베네타의 장인적인 전통이 현대적인 소재 실험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신호처럼 읽히기도 하니까요. 얇은 가죽 스트랩을 장인들이 손으로 정교하게 엮는 시그니처 수공예 기법이 다른 형태로 번역되어 등장한 셈입니다.
밀라노 사람들의 옷에 대한 태도 또한 이번 컬렉션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밀라노에서는 'Sciura Milanese'라는 표현이 통용됩니다. 화려하게 과시하지 않으면서도 절제된 옷차림으로 자신만의 품위를 드러내는 스타일을 일컫는 말인데요. 밀라노 특유의 절제된 우아함은 검은 코트, 잘 재단된 재킷, 편안한 니트 같은 옷들이 대부분이지만 소재와 비율, 작은 액세서리의 균형이 전체 인상을 완전히 결정짓는 법이죠. 루이스 트로터의 쇼 노트에서도 이러한 감각은 중요한 레퍼런스로 등장합니다. 오랜 향수를 건드리는 플로럴의 터치와 할머니의 이브닝 백, 아버지가 오래도록 신어온 구두 한 켤레 같은 요소들이 스타일을 넘어 기억과 시간의 층위를 아우르는 매개가 됩니다.
JAMES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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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쇼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분위기는 점점 더 강렬해졌습니다. 런웨이를 가로지르는 붉은 카펫 위로 퍼와 깃털처럼 보이는 텍스처의 룩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죠. 실루엣은 점점 더 과장된 형태로, 소재의 질감은 점점 더 강조됐습니다. 강한 색감과 풍성한 표면은 초반에 등장했던 구조적인 테일러링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기 시작했어요. 그 와중에 사운드워크 컬렉티브와 협업한 음악이 쇼가 진행될수록 점차 고조되며 컬렉션의 감정선을 확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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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퍼 룩에 이어 마지막 모델이 등장했습니다. 검은 퍼로 만들어진 조각 같은 실루엣에 강렬한 붉은 헤드피스를 얹었는데요. 붉은 런웨이 위에서 검은 형태는 더욱 또렷하게 드러났고 모델은 무대 위 마지막 장면처럼 천천히 공간을 가로질렀습니다. 구조적인 테일러링으로 시작한 쇼는 이 마지막 장면에서 감각적인 장식과 극적인 형태로 완전히 확장되며 하나의 공연처럼 마무리됐죠.
보테가 베네타의 2026 겨울 컬렉션은 밀라노라는 도시 자체를 닮았습니다. 거리에서 바라보면 단단하고 절제된 외관을 가진 건물들과 안으로 들어서면 안뜰과 정원이 자리해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간직한 공간들. 밀라노 건축 특유의 대비처럼 이번 컬렉션 역시 구조적인 테일러링으로 시작해 점점 더 부드럽고 감각적인 세계를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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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선덜랜드 출신의 루이스 트로터는 이번 컬렉션 쇼를 통해 밀라노라는 도시의 구조를 하나의 패션 언어로 번역한 셈이죠. 탁월한 테일러링 감각은 하나의 설계 방식처럼 보이는데요. 어깨선과 실루엣, 소재의 질감을 통해 옷의 구조를 세우고 그 위에 감각을 덧입히기. 마치 건축가가 건물의 프레임을 세운 뒤 그 안에 공간을 만들듯 말입니다.
밀라노의 건물들이 단단한 외관 뒤에 숨겨진 안뜰을 품고 있듯 루이스 트로터의 옷 역시 구조적인 테일러링 아래 감각적인 세계가 존재합니다. 그 내공은 한 시즌의 스타일을 넘어서는 경지에 이른 게 분명합니다. 이번 컬렉션으로 내비친 루이스 트로터의 비전은 하나의 컬렉션에 그치는 게 아니라 보테가 베네타라는 거대한 하우스를 재설계하는 과정에 돌입한 것처럼 보이니까요. 가죽 공예와 장인 기술로 축적된 보테가 베네타의 유산 위에 새로운 구조를 세우는 일. 밀라노 건축이 세월에 따라 층층이 새로운 공간을 더해가듯, 루이스 트로터는 하우스의 기존 구조를 존중하면서 그 위에 또 하나의 층을 더하는 중입니다. 이번 컬렉션 쇼는 그 설계도의 두 번째 장에 해당할 테고요.
Credit
- 사진 COURTESY OF BOTTEGA VEN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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