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 앤더슨의 손맛, 30년 수집이 만든 영화 속 우주
완벽한 대칭과 파스텔 톤 속 장인 정신. 런던 디자인 뮤지엄의 전시 <Wes Anderson: The Archives>에는 영화감독 지난 30년간웨스 앤더슨이 수집하고 제작해온 소품 700여 점이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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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군 사랑에 빠지다 Rushmore>에 등장하는 맥스 피셔의 스위스 아미 나이프.
웨스 앤더슨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 시퀀스가 시작될 때마다, 현실의 채도와 심도가 단숨에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마치 눈앞에 거대한 인형의 집이나 입체 동화책을 펼친 것처럼. 비평가들은 이를 ‘플래니메트릭’ 구도로 설명한다. 카메라가 피사체와 지독할 정도로 완벽한 수평을 이루고, 배경 벽면 또한 카메라와 평행하게 배치되는 이 방식은 화면의 깊이감을 의도적으로 제거해 평면적 레이어를 겹쳐 쌓는다. 현실과 거리감을 만들어, 영화 속 세계를 또 다른 독립된 우주로 느끼며 관찰하게 하는 것이다. 웨스 앤더슨의 전매특허 기법은 또 있다. 그는 등장인물을 지독할 정도로 완벽하게 좌우 대칭을 이루는 공간에 세우곤 한다. 그 한가운데에서 캐릭터들이 무표정하게 엉뚱한 행동을 하는 유머 역시 웨스 앤더슨의 상징적인 스타일.
<다즐링 주식회사 The Darjeeling Limited>의 기차 미니어처 모델.
<프렌치 디스패치 The French Dispatch>에 등장하는 매거진 표지.
<개들의 섬 Isle of Dogs>의 미니어처 세탁기.
<애스터로이드 시티 Asteroid City>의 기차 미니어처 모델과 표지판과 <다즐링 주식회사>의 태양계가 그려진 칠판.
앤더슨은 영화 장면 속의 모든 미장센을 손으로 공들여 만든다. 손글씨로 꾹꾹 눌러쓴 편지 봉투의 잉크 자국, 세월의 흔적이 묻은 가죽 가방의 갈라짐, 자수를 놓은 의상, 나무로 깎은 미니어처까지, 손에 만져질 듯한 질감으로 작품을 채운다. 모든 것이 매끈한 디지털 픽셀로 대체되는 AI 시대에 핸드메이드를 고수하며 만든 웨스 앤더슨의 영화에는 CG에 저항하는 촉각적 아날로그와 장인 정신이 있다. 앤더슨은 자신의 영화 속 모든 소품을 직접 검수하고 수집하는 ‘아키비스트’이기도 하다. 기술이 대체할 수 없는 ‘손맛’으로 영혼을 불어넣은 장면들은 전혀 우연이 아니며, 철저한 기록과 설계에서 나온다. 앤더슨이 직접 만지고 배치한 영화 속 오브제를 보며 우리는 이 가상세계가 물리적 세계에 존재하는 누군가의 집요한 노동으로 탄생했음을 감상한다. 휘발되는 디지털 데이터 대신 손때 묻은 물건의 온기를 그리워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촉각적 스토리텔링은 마치 이 세계가 어딘가에 실존했던 정교한 역사 같아 더욱 위로가 된다. 지금 런던 디자인 뮤지엄에서는 웨스 앤더슨의 미학을 돌아보는 <Wes Anderson: The Archives> 전이 열리고 있다.
<다즐링 주식회사 The Darjeeling Limited>의 휘트먼 형제가 든 ‘프랑수아 볼테르’ 수트케이스.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또 다른 자판기.
<판타스틱 Mr. 폭스 Fantastic Mr. Fox> 속 미스터 폭스의 미니어처 오토바이.
<애스터로이드 시티 Asteroid City>의 자판기.
<문라이즈 킹덤 Moonrise Kingdom> 속 샘 샤쿠스키의 스카우트 키트.
시네마테크가 아닌, 디자인 뮤지엄에서 열리는 전시다. 지난 30년간 영화계에서 독보적인 문법을 구축해 온 웨스 앤더슨의 머릿속을 입체적으로 구현하고, 한 예술가가 자신의 상상을 현실로 옮기기 위해 얼마나 집요하게 ‘오브제’에 집착해 왔는지를 기록으로 보여준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선을 압도하는 것은 700점이 넘는 전시물의 규모. 앤더슨은 1996년 데뷔작 <보틀 로켓 Bottle Rocket>(1996)의 낡은 노트부터 2025년 최신작 <더 페니키언 스킴 The Phoenician Scheme>(2025)의 정교한 보석 단검까지, 자신이 창조한 세계의 파편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수집해 왔다. 특히 3m 너비로 우뚝 솟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The Grand Budapest Hotel>(2014)의 분홍빛 외관 모델이나 실물 크기로 재현한 <애스터로이드 시티 Asteroid City>(2023)의 기괴한 자판기들은 스크린이라는 평면 뒤에 숨겨져 있던 물리적 실체와 마주하게 한다.
전시에선 웨스 앤더슨이 영화 작업을 위해 집요하게 기록해 온 노트도 공개됐다. 캐릭터의 세밀한 습관부터 공간 색감까지 기록된 아카이브는 그의 독보적인 시각 문법이 철저한 설계에서 탄생했음을 보여준다. 자신이 창조한 소우주 속 퍼펫 모형을 응시하는 웨스 앤더슨.
CG가 아닌, 인간의 손으로 직접 깎고 칠한 사물이 뿜어내는 기묘한 생동감. 웨스 앤더슨에게 디자인은 배경이 아니라, 서사가 아닐까. 전시장은 영화의 정서적 흐름을 따라 벽면의 색조가 체리 레드에서 가닛 그리고 몽환적인 더스티 핑크로 서서히 변해가는 마법 같은 공간으로 연출됐다. 파리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의 첫 공개보다 무려 300점 이상의 오브제가 추가된 이번 런던 전시는 웨스 앤더슨의 완벽주의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젊은 영화감독 시절부터 모든 소품을 아카이브로 보존할 비전과 선견지명을 가졌다는 것은 우리에게 엄청난 선물과 같아요.” 이번 전시의 공동 큐레이터 요한나 아게르만 로스의 말이다.
사실 이 거대한 아카이브의 시작점에는 씁쓸한 상실의 기억이 있다. 1996년 데뷔작 <보틀 로켓>을 찍을 당시, 신인 감독이었던 앤더슨은 영화 제작이 끝난 뒤 자신이 공들여 고르고 만든 소품과 의상이 제작사 소유로 귀속돼 뿔뿔이 흩어지는 걸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다. 자신이 창조한 세계의 조각들이 타인의 손에 팔려 나가거나 어두운 창고에서 잊히는 것을 본 앤더슨은 두 번째 장편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 Rushmore>(1998)부터 촬영이 끝난 모든 오브제를 직접 수집하고 관리하며 자신이 창조한 세계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앤더슨은 여전히 종이에 글씨를 쓰고 천을 고르며 미니어처를 만든다. 단 몇 초간 배경으로 스쳐 지나가는 잡지 표지 한 장, 동화책 한 권도 직접 디자인하고 손으로 만든다. 이 전시는 그런 아날로그적 집착이 결코 구시대적 유물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을 자극하는 가장 현대적이고 강력한 예술임을 보여준다. 전시장에 놓인 앤더슨의 빛바랜 스프링 노트 속의 친필 메모와 스토리보드들은 우리가 열광하는 완벽한 대칭 화면들이 실은 수만 번의 고뇌와 수작업을 거친 장인 정신의 산물임을 말해준다. 완벽한 대칭과 파스텔 톤의 미학에 숨겨진, 예술가의 뜨거운 손맛을 확인하고 싶다면 런던으로 향해 보기를. 전시는 7월 26일까지 열린다.
Credit
- 에디터 이경진
- 디자이너 김강아
- 디지털 디자이너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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