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히잡 쓴 스파이커가 열어젖힌 세계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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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2024 시즌 첫 경기 MVP, 첫 라운드 MVP. 배구 황제 김연경이 뛰고 있는 흥국생명과의 경기에서 양 팀 최다 득점을 올리며 역스위프 승리를 이끈 선수. 이 모든 수식어는 인도네시아에서 온 무슬림 여성, 정관장 레드스파크스 소속 ‘메가왓티 퍼티위’의 것이다. 지난 시즌 올해 한국 배구 리그(V리그)에 생겨난 가장 큰 변화는 아시아 쿼터제였다. 아시아 10개국 출신 선수 중 한 명을 각 구단에서 기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매년 팀마다 외국인 선수는 한 명씩 있었지만, 대부분 한국 선수보다 신장이나 힘이 좋다고 여겨지는 비아시아권 선수들이 선발돼 왔는데, 아시아권에 한정해 한 명 더 선발할 수 있게 됐으니 커다란 변화일 수밖에. 심지어 다음 시즌부터는 국가 수가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처음에는 국제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태국 출신 선수에게 많은 시선이 모아졌고, 실제로 그들 모두 V리그에서 엄청난 기량을 뽐냈다. 그러나 리그가 시작되자 한국 프로스포츠 역사상 최초로 히잡을 쓰고, 민소매와 반바지인 유니폼 아래 긴팔 타이츠를 꼼꼼히 착용한 인도네시아 선수가 리그를 ‘뒤집어놓았다’. 이름은 메가왓티, 별명은 ‘메가트론’.

솔직히 고백하면 나도 무슬림 여성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소극적이고, 새로운 환경에서 잘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는. 무엇보다 코트에서 활약하는 무슬림 여성의 존재를 상상해 본 적 없었다. 그러던 중 리그 데뷔전에 나타난 메가왓티는 웜업에서부터 코트 분위기를 올리고, 가장 높이 날아오르고, ‘메가트론’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경기장을 울리는 스파이크로 상대 팀 선수는 물론 팬들까지 긴장시켰다. 득점 후 가장 크게 포효하면서 경기장을 열광시키는 에너지, 스스로 존경한다고 밝힌 세계적인 배구선수 앞에서도 주저하지 않는 플레이, 위기였던 경기를 스스로 해결한 후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승부욕. 피부와 머리를 가린 히잡과 타이츠로도 감춰지지 않는 스포츠 스타의 탄생을 경기장에서 지켜본 날이 잊히지 않는다. 이미 태국, 베트남 리그를 경험하고 한국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선 메가왓티는 세계 어디로든 갈 수 있음을 믿는다고 인터뷰했고, 우리 모두 그의 찬란한 미래를 굳게 믿도록 만들었다.

V리그 아시아쿼터제 도입 이후 가장 사랑 받는 선수로 떠오른 메가왓티

V리그 아시아쿼터제 도입 이후 가장 사랑 받는 선수로 떠오른 메가왓티

정관장 레드스파크스에 메가왓티가 있다면, IBK기업은행에는 폰푼 게드파르드 선수가 있다. 아시아 쿼터제가 알려지자마자 전체 1순위로 꼽힌 태국 국가대표 주장 겸 세터. 공격수에게 볼을 분배하고, 사실상 코트 지휘자 역할을 해야 하는 세터를 외국인이 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이미 유럽 리그까지 경험한 폰푼에겐 기우였다. 폰푼이 엄청난 환호와 함께 코트에 처음 등장했을 때, 모든 선수에게 소리치고 사인을 주는 카리스마를 목격한 후 ‘언니’란 나이가 아닌 계급이라는 대원칙에 따라 그를 ‘언니’라 부르기로 다짐했다. 다부진 어깨와 허벅지에서 나오는 파워 플레이, 경기장에 ‘똑딱핀 부대’를 생성한 독보적인 헤어스타일,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게 분명하다며 해설진도 기함하게 만든 경이로운 백 토스, 인터뷰에서 유감없이 드러나는 자신감과 스타성. ‘태국 여성’ 하면 일반적으로 연상되던 어떤 이미지도 그에게는 들어맞지 않았다.

처음 배구를 보던 시기, 머리 짧은 여성 선수들을 본 엄마가 “남자 같은 애들이 있네”라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남자 같은 게 아니라 머리가 짧고 어깨가 넓은 여성도 있을 뿐이라고 되받아친 기억도. 그래서 메가왓티와 폰푼 선수를 보는 지금은 무슬림 혹은 태국 여성답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표현인지 안다. 모든 여성은 종교와 국적에 갇히지 않는 존재지만, 동시에 특정 종교와 국가의 여성들은 각자의 다양한 모습으로 해당 종교와 국가를 대표하는 것이므로.

이슬람 교리에 대한 이해도나 개인적 견해는 다르겠지만, 경기를 이기고 나면 상기된 표정으로 “알라에게 감사한다”고 말하는 메가왓티 선수에게서 느끼는 감동은 종교를 초월하는 뜨거운 공감이다. “(저와) 다른 종교를 가진 분들도 삶에서 신의 존재를 느끼시기 바란다”고 인터뷰했던 선수의 말처럼 그와 다른 종교와 국적을 가진 사람들도 타인이 만든 분류나 판단에 갇히지 말고 당신의 심장을 뛰게 할 배구 스타를 뜨겁게 만나보길 권한다.

곧 다음 시즌을 위한 아시아 쿼터 트라이아웃이 시작된다. 지난 시즌을 함께하며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힌 모든 선수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앞으로도 1년간 편견을 가르고 날아올라 통쾌한 스파이크로 내 일상을 밝혀줄 새로운 선수를 기다린다. 편견에 갇혀 있던 나 또한 이번 시즌 내 눈앞에서 배구공을 ‘후려갈겨준’ 선수들 덕분에 지난해보다 조금이나마 덜 부끄러운 팬으로서 더 크게 환호를 보낼 예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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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민지

다양한 비혼자의 일상을 이야기하는 예능 팟캐스트 〈비혼세〉 진행자이자 출판 레이블 ‘아말페’ 대표. 〈걸어서 환장 속으로〉 〈난 슬플 땐 봉춤을 춰〉를 썼다. 여성의 몸과 사랑, 관계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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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이마루
  • 글 곽민지
  • 아트 디자이너 민홍주
  • 디지털 디자이너 김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