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 보이스] 스승 김대감
2024.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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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해 난 지각생은 아니었다. 그래도 지각생들과 어울렁더울렁 섞여 반성문을 쓰고 놀았다. 그 모습이 지나치게 즐거워 보였을까? 곧 지각생들은 몰려 있지 못하게 격리 수용됐다. 독방에 갇혀보니 학교가 감옥에 비견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때 난 흰 벽과 마주 보며 딜레마라는 개념을 배웠다. 학교에 오면 내가 직접 갇히고, 학교에 안 오면 아빠가 이런 데 갇히는구나. 이러니 학교생활만 잘해도 효도라는 모양이었다. 깨달음에 이른 나는 아버지 얼굴을 떠올리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효도고 나발이고 여기 있고 싶지 않았다. 둘 중 하나가 꼭 갇혀야 한다면 나보다 훨씬 더 ‘애티튜드’가 좋은 아버지를 추천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부모를 제물로 삼을 순 없으니 다른 대책이 필요했다. 방과 후 징역의 가장 큰 문제는 그 시간이 아주 지루하다는 거였다. 난 나름 베테랑이라 반성문 쓰는 속도가 빨랐다. 소일거리가 순식간에 동나버린다는 얘기다. 공부 같은 건 선택지에 없었으므로 궁여지책으로 만화책을 떠올렸다. 아직 대여점 문화가 살아 있던 시절이었다. 권당 300원만 내면 누구나 재미있는 만화책을 1박 2일 대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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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반환이 시급해진 나는 부랴부랴 항복의 언어를 휘갈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음에도 없는 말을 적다 보니 모든 것이 지긋지긋하다 못해 화가 치밀었다. 소녀들에겐 종종 눈알이 도는 때가 온다. 짜증과 당황, 분노, 민망함, 무력감 같은 것들이 뒤섞여 소녀 모양의 불도저로 변하는 시간 말이다. 처음 애절한 호소로 운을 뗀 반성문은 갈수록 다중인격자가 쓴 것처럼 울고 웃고 화내고 난리치는 글로 변해갔다. 내가 보기에 그 반성문은 부적절한 종이 낭비였다. 너무 되바라진 데다 결과적으로 반성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대감 선생님은 화를 내지 않았다. 이상한 건 원숭이 잡문에 대한 그녀의 소감이었다. “와, 너 나중에 작가 하면 되겠네. 장난 아니다, 야.” 나는 내내 어리둥절하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 말이 칭찬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쩐지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여태까진 아무도, 그 누구도, 심지어 나조차 내 미래를 긍정적으로 점쳐 본 적 없었다. 수많은 어른이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냐 다그치면서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들이 아는 ‘뭐’ 속에 내 몫은 없어 보였을 것이다. 나도 마음속으론 동의하고 있었다. 책상에 몇 시간 앉아 있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제대로 된 직업이 주어질 것 같진 않았다.
바로 그때 김대감의 한 마디가 오랜 체념에 파동을 일으켰다. 그 후로 물음표가 많이 붙는 대답이 가능해졌다. “그러게요, 저는 커서 뭐가 될까요? 어쩌면 작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적어도 한 명은 내가 작가가 돼도 좋다고 여기는 것 같으니까요.” 나는 뻔뻔해지면서 희망을 배웠고, 희망에 먹이를 주면서 그것이 별로 사납지도, 두렵지도 않다는 걸 알았다. 언젠가 김대감 선생님을 다시 만난다면 예쁜 마음으로 써 내려간 글도 보여드리고 싶다. 저는 정말 작가가 됐는데, 덕분인 것 같다는 고백과 감사 인사도 함께.
Writer

정지음
싫은 것들을 사랑하려고 글을 쓴다. 25세에 ADHD 진단을 받은 이후 질환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1992년생. 〈젊은 ADHD의 슬픔〉으로 8회 브런치북 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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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이마루
- 글 정지음
- 아트 디자이너 민홍주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