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게 해주는 것들
2024.06.04

©mila_young
올해의 어린이는 횡단보도에서 만났어. 보행자 신호에 양보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는데 그 목소리가 참 맑고 듣기 좋더라. 올해의 평안은 너랑 우연히 들렀던 가정식 식당에서 누렸어. 날도 덥고 계획도 다 어긋나서 속상했는데, 어쩌다 들어간 그곳의 생선튀김이 맛있었고 주인이나 손님도 다들 친절했잖아. 그 따뜻함에 여독이 다 씻기더라.추산해 보니 불행은 강도만 높을 뿐 빈도는 적었다. 내 지난날을 버티게 해준 건 억센 불행이 아닌, 잔잔하지만 명징한 행복이라는 걸 깨달으며 올해의 첫 종소리를 들었다.

©영화 사운드오브뮤직
근래에 파주에서 줌 토크를 했다. 48명의 독자와 1시간가량 같은 화면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으나 내가 가장 궁금했던 건 독자들의 반응과 마음이었다. 그래서 자주 댓글 창을 살폈던 것 같고. 말주변이 없는 나에게 박수 이모지와 하트를 보내며 다들 다정한 마음을 기꺼이 건넸고,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었다. 혐오가 만연하는 시대에 다정을 지켜낸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생활 속에서도 그러한데 글이라고 다를까. 나부터도 누군가의 글을 뾰족한 시선으로 독해하는 걸 더 쉬운 방식으로 여긴다. 누군가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마음으로 읽는 건 힘겨운 일이지만 또 누군가는 그 일을 해낸다. 나는 읽는 이들로부터 그것을 배운다. 줌 토크가 끝나기 전, 그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불러보았다. 령윤, 이음, 지혜, 하나, 캔들, 준민, 산타…. 모니터의 안과 밖이 한데 이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그 밤을 갈무리했다.
나는 결산을 즐기지 않지만, 소설을 탈고하거나 책을 묶을 때면 집필 기간 동안 내가 느낀 것과 남긴 것에 대해 어쩔 수 없이 정리해야 한다. 부지런히 썼으니 성취감에 도취되기도 하지만, 그 짜릿함은 길지 않다. 성취나 업적을 위해 쓰다 보면 집필이 충족이 아닌 결핍이 돼버린다는 것을 이제는 깨닫기도 했고. 지적 재산이 남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 역시 나를 계속 쓰게 만드는 힘은 아니다. 결국 글을 쓸 때마다 유일하게 축적되는 건 누군가의 독려와 사랑인 것 같다. 그것이 나를 온전히 채워주고, 살아가게 만든다. 줌 토크를 마치고 사회를 봐준 마케터님이 그날의 댓글을 모음집으로 만들어 메일로 보내주었다. 이 역시 ‘나를 살게 해주는 것’ 폴더에 담아두고 종종 꺼내 본다. 간혹 그들이 건넨 사랑에 비해 내가 꺼내놓은 사랑이 한없이 작다는 생각이 든다. ‘읽어줘서 고마워요’라는 말이 보잘것없이 느껴질 때도 있다. 자주 이 사랑에 관해 언급해 의미가 퇴색되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하고. 그럼에도 내 글을 읽어준 당신께, 내 슬픔까지 기꺼이 끌어안아주는 당신께 귀에 못이 박이도록 전하고 싶다. 내게는 귀해요 당신이.
Writer

성해나
소설가.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 <두고 온 여름> 을 펴냈다. 깊이 쓰고, 신중히 고치며 나아가려 한다.
Category
Credit
- 에디터 이마루
- 글 성해나
- 아트 디자이너 민홍주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