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이 작은 브랜드를 사랑하는 이유
알고리즘을 떠들썩하게 만든 패션에 관해 이야기하는 <마이 아이콘>, 두 번째 주인공은 Z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은 스몰 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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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나는 편견 덩어리다. 그런 내 알고리즘엔 별 게 다 뜬다. 이를테면 미니 백을 자주 드는 사람일수록 연평균 독서량이 현저히 낮다든지,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의 교체 주기가 짧을수록 정서가 불안정할 확률이 높다는 골자의 밈 같은 것들 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자극적인 건 단연 ‘스타터 팩’이다. 스타터 팩은 ‘올여름 브랫 걸이 되기 위한 필수 아이템’, ‘코리안 고프코어 마스터 하는 법’, ‘앤트워프 식스맛 고딕 시크 엔트리’처럼 획일화된 패션을 추종하는 집단을 신랄하게 꼬집는 시리즈다. 스탠리 텀블러부터 딕 비켐버그 부츠까지, 합을 맞춘 것도 아닌데 소름 돋을 정도로 똑같은 아이템으로 중무장한 이들이 누끼 이미지로 박제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순수한 궁금증이 고개를 들었다. 이토록 매서운 디지털 단두대를 비켜 간 브랜드가 과연 몇이나 될까?

팔로마 울 2024 F/W 캠페인에 등장한 미즈하라 키코.

기마구아스 2024 F/W 캠페인에 등장한 릴라 모스.
놀랍게도 영예의 주인공은 소위 말해 ‘요즘 옷 좀 좋아한다는 여자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브랜드’였다. 팔로마 울, 기마구아스, 마리암 나시르 자데, 가브리엘라 콜 가먼츠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두아 리파, 릴리 로즈 뎁, 로살리아, 에밀리 라타이코프스키 같은 메가 잇걸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도, 트렌드의 최전선에 선 브랜드답지 않게 조용하고 험블한 매력을 뽐낸다는 것이다. 팔로마 울은 한국에서 두 번이나 팝업 스토어를 성황리에 개최했으며, 기마구아스의 쌍둥이 자매 디자이너 듀오는 샵아모멘토를 직접 방문해 한국 팬들을 만났다. 마리암 나시르 자데, 가브리엘라 콜 가먼츠도 꾸준히 팬층을 거느리며 한국과 일본에서 남녀 불문 큰 인기를 구가 중이다.
브랜드는 그와 비슷한 결의 사람들을 자연스레 불러 모으기 마련이다. 그 숫자가 어느 정도 임계점에 도달하면 이는 어느새 하나의 유형으로 카테고리화된다. 그런 다음 해당 브랜드를 맹목적으로 좇는 군상이 양산되면 결국 스타터 팩 같은 무시무시한 심판대에 오른다. 주류와 컬트, 명품과 스트리트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에르메스와 코페르니는 공평하게 도마 위에 오른다. 판단은 오로지 동시대 패션 누리꾼의 몫이다.

동명의 브랜드를 전개하는 디자이너 마리암 나시르 자데.

모든 피스에 고유의 넘버링을 부여하는 가브리엘라 콜 가먼츠.
까다로운 젊은 여자들에게 꾸준히 사랑받으면서도, 결코 획일화되지 않는 이들의 비결은 무엇일까? 결국엔 돈 냄새가 아닌, 디자이너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전해지는지가 핵심이다. 공교롭게도 앞서 언급한 브랜드들의 설립자는 모두 여성이다. 2008년 동명의 뉴욕 편집숍에서 출발한 마리암 나시르 자데의 인스타그램 피드에는 몇 년째 그녀의 구부정한 거울 셀피가 등장한다.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곱슬머리와 무심하다 못해 투박한 레이어링 사이에서 유독 반짝이는 얼시한 컬러의 레더 백은 그야말로 쿨의 정수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두 딸과 그녀의 소박한 일상은 훗날 나와 함께 나이를 먹을 마리암 나시르 자데의 옷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팔로마 울은 스스로를 브랜드가 아닌 프로젝트라 명명한다. 창립자 팔로마 라나는 사진가, 행위예술가, 미술가와 손잡고 기존의 틀을 깨는 실험을 지속한다. 그는 팔로마 울이 예술과 패션을 아우르는 하나의 장이 되길 바란다. 2022년 파리에서 열린 ‘밧세바’ 퍼포먼스에선 모든 여성을 위한 옷을 주창하는 팔로마 울의 철학이 가장 잘 드러난다. 성경에서 다윗 왕은 밧세바의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본 뒤, 그의 남편을 죽여서까지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한다. 모델들은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한 채 목욕탕에 들어가, 가장 사적이어야 할 순간마저도 대상화되고 만 밧세바의 현실을 고발한다.
게다가 이들은 작은 것에서 영감을 싹 틔운다. 자연, 사랑하는 사람들, 여행처럼 말이다. 캠페인의 배경도 강렬한 조명에 절로 눈이 시려 오는 스튜디오가 아닌, 바다, 모래, 숲, 바위 또는 누군가의 내밀한 방이다. 루틴한 컬렉션 스케줄에서 벗어나 ‘시리즈’를 기반으로 브랜드를 전개하는가 하면, 완벽하지 않아 더욱 특별한 날것의 디테일로 마음을 사로잡는다. 자연스럽게 주름 잡힌 봉제선이 멋스러운 가브리엘라 콜 가먼츠의 오픈 토 슈즈나 지중해의 작열하는 태양을 재현한 기마구아스의 투박한 핸드 다잉 패턴처럼 말이다.
혹자는 지극히 주관적이라고 여길 이 주장을 뒷받침해 줄 구원투수 같은 영상을 얼마 전 틱톡에서 발견했다. ‘Niches Fashion Girl’이라는 닉네임에 걸맞게 그는 2025년 새롭게 주목해야 할 트렌드로 ‘내레이션 코어’를 꼽았다. 그는 책을 읽고 영화관을 드나드는, 한 마디로 자신만의 세계가 단단하며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간직한 여자가 입을 법한 패션이 부상하리라 점쳤다. 그가 꼽은 피스들의 비정형적인 실루엣과 자연을 닮은 차분한 미색, 오래도록 입은 듯 빈티지한 무드는 획일화라는 처형대를 유연하게 피해 간 브랜드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미우미우 2023 F/W 컬렉션.

전 세계 8개 도시에서 동시 진행된 2024 미우미우 썸머 리드.
해당 영상이 ‘코어’라는 단어를 남발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은 차치하더라도, 올해 더욱 많은 여자들이 스몰 브랜드에 열광할 이유는 이로써 명료해졌다. 결국 우리는 매끈한 최신의 것보다 시간의 때가 묻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존재의 가치를 더 높이 사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우미우가 전개하는 문학 클럽 ‘라이팅 라이프’와 북 큐레이션 ‘썸머 리드’는 실로 똑똑한 선택이다. 실제로 지난 2024년, 미우미우는 리스트 인덱스에서 쟁쟁한 하우스 브랜드를 제치고 4분기 연속으로 세계에서 가장 핫한 브랜드에 이름을 올렸다. 말괄량이 같다가도 당최 속을 알 수 없는 여자의 옷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미우치아 프라다의 진보적인 컬렉션은 이 시대의 소녀들이 추구하는 내레이션 코어와 정확히 일치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스몰 브랜드는 전통적인 명품 하우스의 역할마저 어느 정도 대행하기에 이르렀다. 타임리스한 실루엣과 올곧은 아이덴티티는 본래 하우스의 전유물이었다. 혜성처럼 등장한 신예 대신 오랫동안 하우스를 고집스레 이끌어온 명장의 철학을 선택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최근 하우스의 잦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교체의 영향일까? 명품 수요 감소로 럭셔리 업계는 고전을 면치 못하는 중이다. 큰 손인 중국 명품 시장은 지난해 20% 급감하며 13년 만의 최대 감소 폭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에 하우스는 매출을 마법처럼 끌어올려 줄 젊고 신선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수시로 교체해 오랜 유산에 쇄신을 꾀하는 중이다. 칼 라거펠트가 36년 동안 샤넬을, 톰 포드가 10년 동안 구찌를 일구던 시대는 끝났다. 2024년 기준 유럽 기반 패션 하우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평균 재임 기간은 무려 2년 미만으로 추락했다.

백부터 슈즈까지 팔로마 울 피스를 걸친 팔로마 라나의 조카 우마.
명품과 타임리스는 더 이상 동의어가 아니라는 증거다. 소비자는 비싼 데다가 영원한 가치마저 찾아볼 수 없는 명품 대신, 합리적인 가격에 디자이너의 시대정신과 사적인 서사가 묻어나는 작은 브랜드를 선택한다. 물론 올드 셀린느, 올드 프라다처럼 하우스의 리즈 시절 매물로 그들의 옛 영광을 다시금 향유하는 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이는 이베이와 디팝을 매일같이 드나드는 병적인 디거만이 누릴 수 있는 전유물에 불과하다. 젊은 피와 노련한 노장이 서로가 가지지 못한 것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동상이몽은 비단 패션계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닐 테다. 기후 위기부터 전쟁, 인구 감소까지 여러모로 인류는 지금 전 지구적 과도기에 살고 있다.
결국엔 또 하나의 새로운 코어에 관해 장황하게 떠든 것이 아니냐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로고플레이로 온몸을 휘감는 하입비스트만 가득한 세상보단, 디자이너의 사적인 이야기에 진심으로 감화되는 몽상가도 공존하는 편이 훨씬 아름답지 않느냐고! 취향에 계급을 매기려는 게 아니다. 그저 남들과 다르고만 싶은 반골의 가벼운 단상도 아니다. 다양성과 진정성에 관해 말할 뿐이다.
Credit
- 글 박지우
- 사진 Instagram ∙ IMAXt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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