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많은 셀럽들은 왜 과거를 입을까?
알고리즘을 떠들썩하게 만든 패션에 관해 이야기하는 <마이 아이콘>, 세 번째 주인공은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아카이브 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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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찌 1998 S/S 컬렉션.
시간의 때가 묻은 건 그 자체만으로도 반짝반짝 윤이 나는 법이다.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마찬가지다. 인스타그램 피드에 일렬종대로 늘어선 말쑥한 캠페인들 사이에서도 유독 빛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디지털 풍화작용을 거쳐 흐릿해진 1990년대 컬렉션 이미지다. 내가 태어난 해에 세상에 나온 톰 포드의 구찌 컬렉션부터 무려 반세기 전 크리스챤 디올의 선글라스까지, 유서 깊은 골동품점을 방불케 하는 신묘한 아카이브 컬렉터의 계정은 순식간에 나를 천진한 어린아이로 되돌려놓는다. 웬만한 문화는 90년대에 이미 르네상스를 맞이했고, 이후의 세대는 그저 끊임없이 과거를 반추할 뿐이라는 주장은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

@virginandwool
오래된 아카이브에는 그런 힘이 있다. 동시대인이 아닌 사람들의 마음까지 속절없이 끌어당기는 마력이. 박물관 카탈로그를 연상케 하는 ‘버진앤울’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하염없이 내리다 보면 마치 내가 빅토리아 시대 의상을 연구하는 학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기하학적이고 민속적인 프린팅과 자수가 수 놓인 프라다의 2000년대 컬렉션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현실과 동떨어진 이름 모를 세계가 머릿속에 피어오른다. 얼마 전 버진앤울은 한남동에 올드 프라다를 주제로 한 팝업의 문을 열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프라다와 미우미우의 아카이브를 총망라한 공간은 그 시절에 태어났을 법한 앳된 얼굴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noboundariez_gallery
그런가 하면 ‘노바운더리즈’는 한 번은 비즈빔, 다른 한 번은 헬무트랭을 주제로 한 전시를 열었다. 몇 년 전 근사한 아카이브를 모아놓은 숍이 한남동에 문을 열었다는 소식에 처음 노바운더리즈 매장을 찾았다. 패션 팬들의 입에 수없이 오르내린 피비 파일로의 셀린느와 마틴 마르지엘라의 2000년대 초 은퇴 직전 컬렉션 등 연식이 오래됐음에도 불구하고 애정으로 보살핀 흔적이 엿보이는 피스들이 진득한 겨울 햇살 아래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천과 가죽에 켜켜이 밴 시간의 향과 오래된 직물이 뿜어내던 이루 말할 수 없이 영험한 기운을 잊을 수 없다.

@for.u.seoul
아카이브를 향한 주인장의 진심 어린 마음에 감화돼 홀린 듯 지갑을 연 적도 있다. 효창동에 자리한 '포유서울'은 느와 케이 니노미야, 꼼데가르송 트리콧처럼 여자들이 좋아할 법한 라인부터 A.F 반데보스트의 오트 쿠튀르 컬렉션까지,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넘나드는 빈티지 숍이다. 재킷 두 개 사이에서 고민하던 내게 그가 뜬금 없이 건넨 건 꼼데가르송의 구조적인 블랙 터틀넥이었다. 유니크한 숄더 라인이 입었을 때 더욱 매력적일 거라며 옆에 놓인 다른 꼼데가르송 피스의 컬렉션까지 줄줄이 읊던 그의 열정에 도무지 결제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한 아리아나 그란데.
아카이브의 훈풍은 콧대 높은 레드카펫까지 불어닥쳤다. 아리아나 그란데가 올해 생애 첫 아카데미 시상식을 위해 준비한 건 깨끗한 신상품이 아니었다. 대신 그는 이브 생 로랑 1991 F/W 컬렉션 드레스와 함께 우아하게 등장했다. 동시대 팝의 여왕이자 억만장자인 그를 위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커스텀 드레스를 제작해 줄 하우스는 널리고 널렸다. 하지만 그는 이브 생 로랑의 전설적인 뮤즈 카트린 드뇌브가 199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 입고 나타난 드레스를 골랐다. 먼지 한 톨 없는 현재가 아닌 손때 묻은 과거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지방시 1999 F/W 오트 쿠튀르 컬렉션 드레스를 입은 켄달 제너.

베르사체 2001 F/W 쿠튀르 컬렉션 드레스를 입은 에밀리 라타이코프스키.
아카이브 드레스 열전은 멧 갈라를 필두로 칸 영화제, 패션위크 등 다양한 공식 석상까지 이어진다. ‘시간의 정원’이 드레스 코드였던 2024 멧 갈라에서는 켄달 제너, 아이리스 로, 에밀리 라타이코프스키 등 수많은 셀러브리티가 화려한 아카이브 드레스 라인업을 뽐냈다. 그 해의 전시 주제였던 <슬리핑 뷰티: 패션의 재조명>에서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의상 연구소의 영구 소장품 250여 점이 공개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오늘날 다시 착용하기 어려운 섬세한 작품 50여 점이 조명됐다.
빠르고 빛나는 것들이 도처에 널린 지금, 우리는 왜 청개구리처럼 케케묵은 아카이브에 열광할까? 결국 아카이브의 본질은 패션의 시간을 통제하는 데에 있다. 역사적으로 패션은 늘 속도와의 싸움이었다. 브랜드가 발 빠르게 신제품을 내놓으면 소비자는 이를 게 눈 감추듯 소비하고, 유행은 금세 지나가 버리고 만다. 작금의 상황에서 아카이브를 꺼내 입는 행위란 곧 견고히 흐르는 패션의 일방향적 서사에서 벗어나겠다는 일종의 선언이다. 아카이브를 걸치는 건 단순한 스타일링을 넘어 과거의 태도와 맥락까지 입는 일이다. 1990년대의 구찌를 입는다는 건 톰 포드가 쌓아 올린 섹슈얼한 시대정신을 다시금 불러오는 셈이다.

런던에서 열린 영화 <챌린저스> 시사회에 참석한 젠데이아.

비비안 웨스트우드 1994 S/S 컬렉션 ‘Café Society’.
게다가 아카이브의 힘은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아카이브를 입는 사람이 누군지에 따라 그 옷이 지닌 메시지는 완전히 달라진다. 예컨대 유럽 의복 역사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여성을 상상한 비비안 웨스트우드 1994 S/S 컬렉션의 스트라이프 셋업은 건강하고 당찬 할리우드 배우 젠데이아를 만나 새로운 동력을 얻는다. 관능과 우아함의 상징이었던 나오미 캠벨이 알라이아 1991 F/W 컬렉션 런웨이에서 선보인 레오파드 슈트는 30여 년이라는 시차를 건너 21세기 잇걸 카일리 제너에게 가닿는다. 결국 아카이브는 현시대의 맥락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내러티브를 만들어낸다. 단순히 패션의 현재만을 좇는 사람과 시간의 축을 자유롭게 오가는 사람 가운데 더 큰 권력을 쥔 건 과연 어느 쪽일까?

2016년 경매에서 역대 최고가인 약 62억 원에 낙찰된 마릴린 먼로의 드레스.
2022 멧 갈라에서 마릴린 먼로의 마지막 드레스에 몸을 욱여넣던 킴 카다시안은 역사적인 드레스를 훼손시킨 것 아니냐는 심판대에 올랐다. 해당 피스는 마릴린 먼로가 1962년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생일 파티에서 입었던 드레스다. 3개월 뒤 그는 약물 과다 복용으로 세상을 떠났고, 결국 이 드레스는 그가 공식 석상에서 입은 마지막 드레스가 됐다. 자본주의의 아이콘인 킴 카다시안과 마릴린 먼로의 마지막 드레스 사이에 벌어진 이 해프닝은 현대 미술을 방불케 하는 어떤 기념비적 순간이다. 현재가 충만함에도 계속해서 과거를 탐닉한다는 건 우리가 비로소 어떤 임계점에 다다랐다는 증거다. 옛것이 더욱 새로워진 지금, 패션도 온고지신이 가능할까?
Credit
- 글 박지우
- 사진 GettyImages ∙ Inst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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