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꿈을 이룬 오타쿠 감독이 엔시티 위시를 만났더니

불완전함의 아름다움이 담긴 '한국형 하이틴'의 정수, 오지원 감독이 믿는 직감의 힘.

프로필 by 김동휘 2025.04.23

'언더무드 필름' 오지원 감독
엔시티 위시 'poppop', 투어스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 트리플에스 'Girls never die', 레드벨벳 '#Cookie Jar' 등을 연출한 영상 감독. 뮤직비디오 외에도 다양한 패션 필름과 독립 영화를 제작했다.

트리플에스 LOVElution ‘Girls' Capitalism’ MV 스틸컷

트리플에스 LOVElution ‘Girls' Capitalism’ MV 스틸컷

투어스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 MV 스틸컷

투어스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 MV 스틸컷

엔시티 위시 'Songbird (Japanese Ver.)' MV 스틸컷

엔시티 위시 'Songbird (Japanese Ver.)' MV 스틸컷


사무실에 들어설 때 웃음이 터졌어요. 토끼들이 반겨주더라고요

언더무드 필름의 심볼이에요. 제가 쌍둥이 이미지를 좋아해서 쌍둥이 토끼를 마스코트로 삼게 됐죠. 절친한 디자이너 헨진(Henzyn)과 함께 약 6개월간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로고와 심볼을 만들어 사무실 곳곳을 꾸몄어요.


언더무드 필름은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는 곳은 아니었죠. 어떤 계기로 뮤직비디오 감독이 됐나요?

원래는 영화 감독을 꿈꿨어요. 대학원에 가고 싶어서 학비를 벌기 위해 선배들에게 하나둘 받은 소규모 작업이 언더무드의 시작이었어요. 대부분 패션 필름이었는데 어느 날 SM 엔터테인먼트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놀랍게도 레드벨벳 '#Cookie Jar' 뮤직비디오 의뢰였죠.


줄곧 패션 필름을 찍다가 뮤직비디오를 작업해보니 어땠나요?

제안을 수락하는 것부터 고민이 컸어요. 소속사 관계자 분들은 제 연출 스타일이 뮤직비디오스럽지 않아서 연락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하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뮤직비디오에서만 볼 법한 요소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죠. 그 시기의 거의 모든 작품을 보며 군무와 립싱크 장면들을 공부했어요. 그리고 제 스타일대로 스토리를 덧붙여 뮤직비디오를 완성했습니다.


뮤직비디오 연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인가요?

처음 기획한 의도가 끝까지 잘 전달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해요. 저는 곡이 가진 스토리와 이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비주얼을 섞어 연출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만큼 맥락을 중요하게 여겨 이유 없는 장면을 최대한 지양합니다. 하지만 작업을 하다 보면 언제나 계획대로만 흘러가진 않아요. 그런 때일수록 처음 음악을 듣고 생각했던 콘셉트와 큰 줄기를 다시 떠올리며 방향을 잡아가죠.


가장 최근 공개된 엔시티 위시 'poppop' 뮤직비디오 작업은 어땠나요? 'Song Bird'에 이어 엔시티 위시와 두 번째 만남이었죠

한번 작업했던 아티스트를 다시 맡게 되면 그들의 실제 모습을 토대로 기획이 가능해 더 재미있는 장면들이 나올 수 있어요. 이번 뮤직비디오는 엔시티 위시 멤버들이 시온 님의 고백을 도와주는 내용이라는 큰 틀이 있었어요. 멤버들끼리 고백을 연습하는 장면을 넣어 진짜 짝사랑 상대의 정체가 헷갈리는 엉뚱한 재미를 줄 수 있겠다 싶었죠. 촬영에 들어가니 유우시 님과 시온 님이 엄청 부끄러워하더라고요. 그래서 팬 분들이 이 장면을 재밌어할 거라고, 팬들을 떠올리며 카메라를 바라봐 달라고 디렉션을 줬어요. 그랬더니 두 사람의 수줍은 모습이 정말 리얼하게 담겼어요.

엔시티 위시 'poppop' MV

엔시티 위시 'poppop' MV

엔시티 위시 'poppop' MV 스틸컷

엔시티 위시 'poppop' MV 스틸컷

엔시티 위시 'poppop' MV 스틸컷

엔시티 위시 'poppop' MV 스틸컷


또 막내 사쿠야 님이 연기를 잘하거든요. 세탁기를 돌리다가 사고를 쳐서 거품이 넘쳐 흐르는 장면이 덕분에 재미있게 잘 나왔죠. 뮤직비디오에 일상과 판타지를 적절히 섞고 싶었는데, 특히 이 장면에서 잘 연출된 것 같아요.

엔시티 위시 'poppop' MV

엔시티 위시 'poppop' MV


풍선을 쥔 멤버들이 공중에 떠올라 '인간 사다리'를 만드는 장면도 흥미로웠어요

콘티 그대로 나온 장면이에요. 사쿠야 님과 유우시 님은 와이어를 타고 다른 멤버들은 밑에서 당기는 척 연기를 했죠. 태국에서 뮤직비디오를 촬영했는데 사실 해외에서 와이어 장면을 찍는 게 쉽지 않아요.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도 위시 멤버들은 늘 열심히 연기를 해줘요. 너무 예뻐요.

엔시티 위시 'poppop' MV

엔시티 위시 'poppop' MV


감독님의 작품을 보다 보면 아티스트에 대한 애정이 물씬 느껴져 뭉클하기도 해요. 특히 트리플에스 'Girls Never Die'가 그 방점을 찍은 작품 같아요

모든 작품을 제 일부를 떼어주듯 모든 걸 쏟아부어 만들어요. 그런 면에서 'Girls Never Die'는 가장 기억에 남는 영상이에요. 개인적인 이야기를 많이 담았거든요. 제가 소녀였던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기억과 그때의 감정들을 모아 이 세상의 소녀들에게 좋은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뮤직비디오 메이킹 필름에서 옥상 장면을 찍은 뒤 감독님이 우는 장면이 화제가 되기도 했죠

트리플에스 유튜브에 공개된 줄 몰랐는데 주변에서 영상 링크를 보내줬어요. 처음에는 너무 민망했어요. 살면서 그렇게 주목을 받아본 적이 없었으니까. 나중에는 많은 분들이 공감해주셔서 좋더라고요. ‘자신의 꿈을 실현한 오타쿠의 모습’이라는 댓글이 기억에 남아요. 그 말이 진짜 맞아요.(웃음)


그 장면을 어떻게 구상하게 되셨나요?

뮤직비디오 기획 단계에서 아이디어 노트를 펼쳐 봐요. 거기에 날개가 하나씩 달린 천사 그림이 있었죠. 날개가 하나만 있으면 불완전한데 손을 맞잡으면 두 개의 날개가 될 수 있잖아요. 여기에서 착안해 두 천사 소녀가 옥상에서 떨어지지만, 결코 추락하지 않고 까마귀가 되어 다시 날아오르는 장면을 연출한 거예요. 곡 제목이 'Girls Never Die'이니까요.

트리플에스 'Girls Never Die' MV

트리플에스 'Girls Never Die' MV


투어스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 스프링쿨러 장면도 인상적이었어요. 어떻게 남자 아이돌 뮤직비디오가 이렇게 아름다울까 싶어서

곡 제목부터 매우 직관적이면서 특이하잖아요. 첫 만남에 실패하는 장면들이 이어지다가 클라이맥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친구들을 처음 만난 입학식에서 스프링쿨러가 갑자기 터지는 장면을 떠올리게 되었죠. 첫 만남이 계획대로 되진 않더라도 그 순간마저 유쾌한 추억이 되는 이야기를 의도했어요. 기획을 하면서 포카리스웨트 하면 떠오르는 청량함이 투어스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그대로 잘 나와서 저도 좋아하는 장면이에요.

투어스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 MV

투어스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 MV


뮤직비디오에 아티스트뿐만 아니라 다양한 얼굴의 보조 출연자들도 등장합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현실감 있는 연출을 좋아해요. 제가 진짜 사랑하는 건 흠 없이 아름답기만 한 것보다는 조금 부족하고, 어쩌면 약간은 추한 순간들이거든요. 아티스트도 완벽한 모습보다는 현실과 이상 사이 어딘가 걸쳐 있는 순간을 담고 싶어요. 그게 가장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보조 출연자와 일상적인 장면을 자주 넣는 편이에요. '진짜'처럼 와 닿게 만들기 위해서요.

투어스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 MV 스틸컷

투어스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 MV 스틸컷

트리플에스 AAA ‘Generation’ MV 스틸컷

트리플에스 AAA ‘Generation’ MV 스틸컷

트리플에스 LOVElution ‘Girls' Capitalism’ MV 스틸컷

트리플에스 LOVElution ‘Girls' Capitalism’ MV 스틸컷

트리플에스 LOVElution ‘Girls' Capitalism’ MV 스틸컷

트리플에스 LOVElution ‘Girls' Capitalism’ MV 스틸컷


감독님의 작품은 불완전하지만 그 자체로 아름다운, '한국형 하이틴' 같아요. 그래서 궁금해요. 학창 시절은 어땠나요?

제주도에 사는 정말 평범한 아이였어요. 특별히 사고를 친 적도 없고. 별난 점이라면 ‘상상 놀이’를 즐겼다는 거? 그냥 누워서 상상을 하며 노는 거예요. 제 또래들은 다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라더군요.(웃음)


저도 그랬어요! 여전히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 잠들곤 해요

그렇게 조용한 아이였던 터라 감독은 특별한 사람만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좋아하는 영화를 보며 막연하게 동경을 가진 정도였죠. 판타지나 미스터리처럼 장르적 색채가 짙은 아름다운 영상을 좋아했어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모노노케 히메>,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 장 피에르 주네 감독의 <아멜리에>, <잃어버린 도시의 아이들> 같은 영화들이요.


그러다 감독이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미술을 좋아해서 조형학부로 대학에 들어갔어요. 1학년 때 영상 개론 수업을 듣는데 직감이 들었죠. '이거다. 지금 내가 영상을 잘 만드는 건 아니지만, 앞으로 분명 잘 하게 될 거야.' 그래서 2학년 때 영상영화과 전공을 선택했어요. Unkle이라는 가수의 'Rabbit In Your Headlights'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이런 영상을 만들고 싶다' 꿈꾸기 시작했죠. 영화 같은 뮤직비디오인데, 슬프면서도 카타르시스가 느껴져요.


왜 그날, 강한 직감을 느꼈던 걸까요?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줄곧 손으로 그리는 미술은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긴 했어요. 카메라로 표현하는 예술이라니, 뭔가 운명처럼 느껴졌던 것 같아요. 저는 직감을 굉장히 중요시해요. 언더무드 필름의 슬로건도 'Feel before Understanding'이에요. 머리로 이해되기에 앞서 몸으로 오는 강한 떨림 같은 거 있잖아요. 작업할 때 그런 직감을 따라가고, 보는 사람에게도 그런 울림이 전해졌으면 해요. 가슴보다도 배에서 올라오는 울렁거림. 그게 저한테는 진짜 직감이에요.


촬영 중에도 배가 울렁이는 강한 느낌을 받기도 해요?

수십 명의 스태프들이 한 장면을 위해 다 같이 숨죽이고 집중하는 순간이 있어요. 너무 소름 돋아요. 어떻게 이런 에너지가 나올 수 있을까 싶어서. 사실 이건 ‘일’이잖아요. 적당히 해도 되고, 한 장면쯤 그냥 흘려보낼 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스태프 한 명 한 명이 이 작품을 정말 잘 만들고 싶어 하는 마음이 느껴질 때 정말 감동적이에요. 그래서 욕심 있는 사람을 좋아해요. 저 또한 대충대충 할 거였으면 애초에 이 일을 안 했을 거예요.


또 어떤 직감이 드세요? 언더무드 필름과 감독님의 미래에 관해

직감보다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어요. 언더무드 필름이 재능 있는 여성들의 프로덕션 하우스로 자리 잡았으면 해요. 좋은 작품을 판단하는 시선은 정말 다양하잖아요. 그 시선에서 각자의 스타일이 생겨나고요. 언더무드의 정체성에 동의하는 다양한 스타일의 여성 크레에이터들과 함께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개인적으로는 뮤직비디오에 머무르지 않고, 더 긴 호흡의 작업도 해보고 싶어요. 영화도 좋고, 웹드라마도 자신 있어요. 이 인터뷰가 새로운 도전의 시작점이 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직감은 없을 것 같아요.

Credit

  • 사진 각 아티스트 공식 유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