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에스파 '아마겟돈' 뮤비는 뷰티샷을 포기한 게 아냐

뮤직비디오로 케이팝 팬들을 홀리는 플러팅 귀재, 윤승림 감독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한 끗 차이.

프로필 by 김동휘 2025.03.12

리전드 필름 윤승림 감독
에스파 '아마겟돈', 아이브 '해야', 하츠투하츠 'The Chase', 세븐틴 '독' 등을 연출한 뮤직비디오 감독. 2024 MAMA 베스트 뮤직비디오상, MMA 베스트 뮤직비디오상을 수상했다.

에스파 '아마겟돈' MV 스틸컷

에스파 '아마겟돈' MV 스틸컷

아이브 '해야' MV 스틸컷

아이브 '해야' MV 스틸컷

하츠투하츠 'The Chase' MV 스틸컷

하츠투하츠 'The Chase' MV 스틸컷




만나게 되면 물어보고 싶었어요. 감독님의 취향이 궁금합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심슨’이에요. 애니메이션 시리즈 <심슨 가족>이 가볍지 않은 메시지를 가벼운 척 풀어내는 특유의 방식이 마음에 들어요. 사실 저는 감성적인 뭔가를 보면 엄청 과몰입하는 편이라 오히려 피하곤 해요. 주변에서는 제 원래 성향이 쿨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반대죠.



감독님의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심슨 굿즈 사진이 자주 보이더군요. 그나저나 창작자로서 무언가를 담아내지 않으려는 건 어떤 의미예요?

저는 하나에 몰입되는 게 싫은가 봐요. 그래서인지 작업의 스펙트럼도 넓은 편이죠. 대중의 피드백에 민감한 직군이다 보니 ‘자가 복제’라는 말을 듣는 게 싫어요. 그래서 비슷한 색의 작업을 피해왔고, 하츠투하츠 뮤직비디오 또한 제가 만든 것 같지 않은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슴슴하지만 잘 만든 평양냉면 같은 영상을 만들고 싶었달까요.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 색깔이 생기는 게 왜 나쁜 거지? ' 그래서 이젠 제 색을 극대화 시킬 작업도 꾸준히 해나가려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처음 선보이는 아티스트를 작업할 때 놓치지 않으려는 부분이 있다면요?

뮤직비디오든 트레일러든, 아이돌 영상의 본질은 플러팅이라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보이넥스트도어는 '옆집 소년'이라는 키워드가 있잖아요. 그런 점에서 멤버들의 이미지에 맞게 팬들이 설렐 만한 연출을 고민했죠. 멤버 이한은 장발이 포인트였는데, 머리가 젖으면 더 멋있을 거라고 생각해 목욕탕을 배경으로 삼았어요. 태산은 보자마자 누구나 좋아할 법한 '인소남' 스타일이라고 확신했죠. 그래서 아파트로 데려갔어요. 클리셰를 쓸 거면 이렇게 써야지 싶어서요.

보이넥스트도어 [HOW?] Trailer Film 스틸컷 보이넥스트도어 [HOW?] Trailer Film 스틸컷 보이넥스트도어 [HOW?] Trailer Film 스틸컷 보이넥스트도어 [HOW?] Trailer Film 스틸컷

최근 신인 그룹 뉴비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팅을 박비 감독과 함께 맡았어요. 뮤직비디오 감독이 아니라 팀의 세계관을 구축하는 역할인 만큼 더 전략적으로 접근했어요. 그래서 VFX 디자이너 출신인 킹건 작가님을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섭외해 독특한 룩을 만들기도 했어요.



그렇다면 이미 꾸준히 활동해온 아티스트와 작업할 때는 어떻게 접근하나요?

뻔한 이야기일 수 있는데,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대중에게 소구되는지를 파악해요. 그다음 너무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변화를 주려고 해요. 연출이 아티스트를 덮어버리면 안 되니까. 예를 들어, 에스파 '아마겟돈' 뮤직비디오는 뷰티샷을 포기했다고 알려졌는데요. 전형적인 조명을 안 썼을 뿐이지, 아티스트를 가장 매력적으로 보여줄 조명 세팅은 확실히 챙겼어요. 전형적인 방식을 피하면서 피사체의 힘을 극대화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에스파 '아마겟돈' MV 스틸컷 에스파 '아마겟돈' MV 스틸컷 에스파 '아마겟돈' MV 스틸컷


아티스트를 잘 담기 위해 촬영 현장에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뭔가요?

그들이 가장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표정과 얼굴의 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현장에서는 아티스트와 함께 고민하며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죠.



연기를 굉장히 잘해서 깜짝 놀라게 만든 아티스트도 있을까요?

에스파 윈터, 세븐틴 호시, 더보이즈 선우, 그리고 태민이 떠오르네요. 퍼포먼스를 넘어 하나의 장면을 만들어주는 아티스트들이라 할 수 있어요. 이들의 연기 덕분에 즉석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연출 방식이 달라지기도 해요. 물론 더 좋은 그림으로.

에스파 '아마겟돈' MV 윈터 스틸컷 호시 'Spider' MV 스틸컷 더보이즈 'ROAR' MV 선우 스틸컷 태민 'WANT' MV 스틸컷


지금 그 얘기가 아티스트를 향한 감독님 최고의 찬사 아닐까 싶네요. 제3자의 눈으로 자신의 작업을 살펴 본다면, 시그니처 연출법은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음, 심장을 뛰게 만드는 것. 서사를 빌드업한 후반부에 폭발시키는 것. 그게 제 작업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어떻게 표현할지는 계속 고민하고 바꾸는 중입니다. 살아있는 영상, 이걸 만들고 싶어요.



그 표현 그대로, 촬영 당시 감독님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으면서 대중들의 반응도 좋았던 장면이 있다면요?

에스파 '아마겟돈' 뮤직비디오에서 날개가 나오는 장면이요. 작업하면서 저 스스로도 "와, 이게 뭐지?" 싶었어요. 그 감정을 뮤직비디오를 보는 이들이 느꼈으면 했어요.

에스파 '아마겟돈' MV

에스파 '아마겟돈' MV

또 XG 'Shooting Star' 뮤직비디오에서 웨이브 안무를 하는 멤버들을 측면에서 비춘 장면이 있어요. 화려한 CG가 들어간 건 아니었지만 각도를 다르게 해 그 안무를 강조했죠. 나름 저의 내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웃음)

XG 'Shooting Star' MV

XG 'Shooting Star' MV



개인적으로는 더보이즈 'Roar'에서 멤버들이 핸드폰 플래시로 현재를 비추는 장면을 좋아해요

아! 그것도 팬들이 좋아할 거라 생각했어요. 'Roar'는 '타락 천사'라는 만화 같은 콘셉트를 가진 곡인데 영상은 날짐승처럼 가볍게 담고 싶었거든요. 더보이즈 멤버들이 촬영 중에 '쿨하게', '장난기 있게'라는 디렉션을 듣고 의문을 갖기도 했는데 나중에 결과물을 보고 나서 제 의도를 이해했다고 하더라고요.

더보이즈 'ROAR' MV

더보이즈 'ROAR' MV



감독님의 작품 중 제 최애 뮤직비디오를 꼽자면 XG 'IYKYK'입니다. 한의원에서 침 맞는 걸 좋아하는데 친구들에게 이 얘길 하면 다들 웃어요. 너무 옛스럽다고. 그런데 감독님은 이 뮤직비디오에 침술을 접목하셨죠.

XG는 비주얼이 강렬한 그룹이잖아요. '지구에 온 뮤턴트'라는 독특한 콘셉트도 있고요. 그래서 뮤직비디오에서는 이들의 내면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러던 중 과학 유튜버 궤도 님의 불나방 이야기를 접했어요. 불나방이 불에 뛰어드는 이유가 '감각 혼란' 때문이래요. 밝은 빛을 향해 올라가는 본능 같은 건데, 이 지구에는 밝은 빛이 너무 많은 탓이죠. 뮤턴트들이 지구에서 겪는 혼란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혼란 상태에서도 내면, 즉 기(氣)를 다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고 그러다 한의원을 떠올렸어요. 일본에는 한의원 대신 침술원이 있다는 걸 알고 침술, 부항, 요가 같은 요소를 함께 넣었어요. 또, 감각 혼란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려고 물이 뚝뚝 흐르는 디테일을 추가했죠. 이렇게 스토리가 섬세한 대신, 색감에서 피곤하게 느껴질 만한 원색을 배제하고 애쉬 톤으로 정리했어요. 경험상 이런 구체적인 설정을 토대로 독특한 연출이 가능하더라고요.


XG 'IYKYK' MV 스틸컷 XG 'IYKYK' MV 스틸컷 XG 'IYKYK' MV 스틸컷 XG 'IYKYK' MV 스틸컷 XG 'IYKYK' MV 스틸컷 XG 'IYKYK' MV 스틸컷


뮤직비디오 제작사 '리전드'를 설립한 지 벌써 10년이 됐어요. 커리어에 터닝 포인트가 된 지점도 있겠죠?

에스파 '아마겟돈'과 아이브 '해야' 뮤직비디오를 찍기 전 1년인 것 같아요. 늘 해왔던 메이저 작업 뿐 아니라 XG 'TGIF', 아이엠 'overdrive', 위댐보이즈의 댄스 비디오 같은 과감하고 독특한 서브컬쳐 스타일까지 정신없이 작업했던 시기였어요. 그리고 이 모든 작업의 스타일이 다 달랐죠. 정신적으로 무척 힘들었지만 그냥 다 찢어보자는 마음으로 버티고 나아갔는데, 이렇게 요란 떨 줄은 몰랐네요.(웃음)


힘든 시간 치고는 너무 크게, 잘 찢으셨는데요(웃음)

작업할 때 일부러 불안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해요. 얼마 전 촬영 때 세트장에서 문제가 생겨서 난리가 났었거든요. 그때도 "어차피 잘 나올 거예요. 유튜브로 확인하세요." 라고 말하며 넘겼어요. 걱정하지 말라고요. 이게 실언이 아니게끔, 이 말을 내가 쉽게 뱉게끔 스스로 성장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죠. 그리고 이 과정을 함께 했던 장동주 PD님과 올해부터는 서로를 응원하며 각자의 길을 가기로 결정했어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지만, 결국 제 좌우명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좋은 의미로 독기 넘치는 사람 같아요. 인스타그램에서 만삭의 몸을 이끌고 현장에 나온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때 작업을 하다가 새벽 4시가 되어서야 라꾸라꾸 침대에 누웠어요. 너무 허리가 아파서요.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었는데 동료 감독님이 이런 얘기를 해 주더라고요. 여성 디렉터들 중 임신한 사람은 없다시피 했는데 저를 보면서 용기가 생겼다고. 너무 영광이고 나름의 책임감이 생기더라고요. 이제 곧 아기를 릴리즈하러 잠시 촬영장을 떠나는데요. 그동안 릴리즈되는 제 작업들이 엄청 많거든요. 아기 갖고 싶으신 분들은 가져도 된다, 할 만하다 고 얘기하고 싶어요.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최초의 레퍼런스가 되고 싶어요



그럴 수 있는 원동력이 궁금해요. 허리가 아프지만 그대로 다시 몸을 일으켜 나가게 만드는 원동력

감독이라는 이름이 주는 책임감. 이래라저래라 지시하는 게 아니라 책임을 지는 역할이 감독이니까요. 조감독한테 만화 주인공처럼 화를 낸 적이 있어요. "겨우 이따위로 만들려고 그렇게 고생들 하는 거야!" 하고요. 영상을 위해 모인 사람들의 노력이 의미 없는 고통이 아니었으면 해요. 어차피 힘든 일이라면 결과물이 좋아야 하잖아요. 작업을 함께 하면 힘들 게 예상되더라도 하이 퀄리티가 나온다는 믿음을 줄 수 있는 감독이 되고 싶어요. 그러면서도 클라이언트의 만족을 이끌어내는 상업성과 예술성을 잘 융화하고 싶은 마음이 커요.

Credit

  • 어시스턴트 에디터 김동휘
  • 사진 각 아티스트 공식 유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