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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사는 남자'에는 가련한 단종 대신 고뇌하는 이홍위가 있다

삼촌에게 왕위를 뺏기고 죽임까지 당한 불쌍한 임금 단종이 드디어 주인공이 됐다.

프로필 by 라효진 2026.01.22

***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내용이 다수 포함돼 있습니다.


드라마틱한 조선왕조 500년 가운데서도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대목을 꼽자면 가장 먼저 단종의 애사(哀史)가 거론될 겁니다. 단종은 어떤 왕보다 막강한 정통성을 지녔지만 16년 평생을 기 한 번 펴 보지 못한 채 타의로 생을 마감한 가련한 임금이었어요. 이 이야기는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를 시작으로 극화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단종의 생애를 한 줄의 로그라인 정도로 기억할 거예요. 대부분의 작품에서 그의 삶이 단순 배경으로 기능해 왔기 때문입니다. 어린 조카를 죽여 왕위에 오른 삼촌 세조와 그의 심복 한명회의 역심, 혹은 목숨 바쳐 단종의 복위를 꾀했던 사육신의 충심을 극대화하는 도구로 활용됐다는 말이죠.


워낙 단명한 왕인 데다가, 단종을 두고 대립한 양측의 서사가 너무 강한 탓도 있습니다. 픽션에 등장한 횟수로 따지면 여느 왕 못지 않지만 늘 비슷한 모습이에요. 수많은 '불쌍한' 단종 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건 KBS 1TV <한명회>와 <왕과 비>, 두 드라마 속 정태우입니다. 온 얼굴을 눈물로 적신 채 "수양 숙부~!"를 외치며 살기 위해 용서를 빌었던 그는 오로지 연기력 만으로 단종 캐릭터의 대표가 된 케이스입니다. 그런데 2026년에 새로운 단종이 등장했습니다. 장항준 감독의 신작 <왕과 사는 남자>를 통해서요. 이번엔 진짜 극의 주인공 자격입니다.



단종은 어떻게 숨을 거두었는지조차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왕입니다. 그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세조 시대의 실록에 '사약을 받았다', '자결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를 두고도 여러 가설과 야사들이 난무하는 상황이죠. <왕과 사는 남자>는 단종의 죽음과 관련한 이야기들을 이어 붙이고 현대적 상상력을 가미해 만들어졌습니다. 단종이 폐위된 후 강원도 영월로 유배됐으며 그곳에서 결국 죽었다는 사실은 그대로입니다. 여기에 권화와 박경여 등이 지은 <장릉지>의 내용이 추가돼요. 단종은 활 끈에 목을 졸려 살해당하고 유해마저 청령포 강물에 버려졌으나, 엄흥도라는 인물이 이를 건져 장사를 지냈다는 대목입니다.



장항준 감독의 상상력이 이 조합에 살을 붙였습니다. 험준한 산이 대부분이고 땅이 척박한 강원도는 실제로 각광 받던(?) 유배지였는데요. <왕과 사는 남자>는 영월로 귀양 온 인물이 다시 득세하게 되면 가난했던 마을이 부강해진다는 설정으로 출발합니다. 유배자가 다시 한양에 돌아가기 전 미리 줄을 대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귀한 물건과 음식들을 싸들고 오니까요. 심심하면 아이들 글 공부도 시켜 주고요. 그래서 영월 산골에서는 한양에서 오는 유배자들을 두고 유치 경쟁을 벌여요. 극 중 노루골 촌장(안재홍)과 광천골 촌장 엄흥도(유해진)이 관청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군수와 안면을 트려는 이유입니다.


이처럼 매우 현대적인 설정이 약 500년 전의 역사에 무리 없이 접붙은 건 보편적 정서를 아교로 쓴 덕이에요. <왕과 사는 남자>의 노루골과 광천골은 마을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경쟁합니다. 누구보다 더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식구들을 배곯지 않게 하려고 유배자를 자기 마을에 두겠다는 거죠. 결국 광천골에는 한양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희박한 노산군(단종)이 오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를 식구로 받아들입니다. 쫓겨난 노산군은 식음을 전폐한 채 버티고 그를 포용한 광천골은 한술이라도 먹이려 애씁니다. 주변에 힘 있고 믿을 만한 어른 한 명이 없어서 청령포까지 귀양 온 노산군은 광천골의 마음이 담긴 밥상에 '식구'의 가치를 처음으로 알게 돼요. 산에서 호랑이와 맞닥뜨렸을 때 "한 명만 먹으면 돌아갈 것"이라며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어른이 있는 마을에서요. 쉽고 흔한 전개지만 그래서 더 강력하고 익숙한 설득력을 갖습니다.



동시에 <왕과 사는 남자>의 단종은 역대 최고로 입체적입니다. 여타 단종 캐릭터는 삼촌을 비롯한 궁중 인물이나 대신들과 접촉할 뿐이었고, 나약하고 가여운 인물로만 그려졌어요. 하지만 궁궐 바깥의 다양한 인간 군상과 만난 노산군 이홍위는 때때로 너털웃음을 짓기도 하고, 민망한 상황에선 헛기침으로 사람을 부르기도 합니다. 또 가끔은 철딱서니 없는 농담을 던지고, 소박한 밥상에 올라온 반찬에서 만든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릴 줄도 알죠. 심지어는 호랑이를 잡는 기개까지 있습니다.



열여섯 살의 이홍위는 죽기 직전의 귀양지에서 겨우 사람을 배웁니다. 그러나 점점 풍부해지는 표정 속에서도 고뇌의 그늘은 여전합니다. 또 다른 삼촌 금성대군(이준혁)이 자신의 복위를 위해 군사를 일으키겠다는 전갈을 보내지만 노산군은 이를 쉽게 열어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털어놓죠. "서찰의 내용도, 나에게 보냈다는 사실도 두렵다"라고요. 이 차분하지만 처절한 고백을 통해 단종이라는 실존 인물을 향한 막연한 연민이 관객 각자의 형태로 바뀔 것 같아요. 떼 쓰고 싶지만 떼 쓸 수 없는, 종국엔 모든 걸 혼자 짊어지게 되는 외로움이 직접적으로 표현된 순간이니까요. 지금껏 없던 단종을 연기한 박지훈에게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쉽지 않은 캐릭터를 맡아 이 만큼의 서사를 온전히 전달했기 때문입니다.


<왕과 사는 남자>의 단종이 입체성을 갖게 된 배경에는 수양대군의 부재도 있습니다. 영화에 수양대군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반정 세력의 진짜 실세는 한명회(유지태)라는 설정입니다. 한명회 역시 기존의 캐릭터와는 조금 다른데요. 왕족 자체를 무능하다고 여기고 깔보는 전형적 엘리트 관료입니다. 수양대군이 배제돼도 말이 되게 만들어 버린 거죠. 또 단종 이야기 속 핵심 중의 핵심이던 '수양대군'의 삭제로 단종이자 노산군, 이홍위의 모습을 더 다각도로 볼 수 있도록 합니다. 2020년대의 것이 맞나 싶은 CGI를 포함해 설익은 부분도 적지 않지만, <왕과 사는 남자>는 새로움을 익숙한 방식으로 설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영화는 2월 4일 개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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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라효진
  • 사진 쇼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