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궁궐 마루에서 영감을 받아 싹 바꾼 아파트 인테리어

도시 풍경과 공예적 온기가 만나면. 건축가 부부의 집에서 발견한 도시 터전의 미학.

프로필 by 이경진 2026.03.18
도시의 빛을 안감으로 삼은 집. 직접 조명을 최소화하고 재료의 텍스처를 살려 빚어낸 안온함. 천장을 가로지르는 패브릭 패널과 그 결을 따라 흐르는 은은한 간접조명이 공간에 부드러운 리듬을 더한다.

도시의 빛을 안감으로 삼은 집. 직접 조명을 최소화하고 재료의 텍스처를 살려 빚어낸 안온함. 천장을 가로지르는 패브릭 패널과 그 결을 따라 흐르는 은은한 간접조명이 공간에 부드러운 리듬을 더한다.

서울 남산 자락, 익숙한 아파트의 현관문을 열면 주위의 시공간이 안온하게 변주되는, 우리가 잊고 지냈던 감각을 일깨우는 공간이 펼쳐진다. 건축사사무소 ‘OFNN’의 박성민 소장과 아내가 가꾼 이 집은 아파트라는 규격화된 구조 안에서 일상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작은 실험실이다. 매일 마주하는 벽의 질감, 창을 타고 넘어오는 햇살, 공간을 채우는 분위기와 공기를 우리는 얼마나 온전하게 감각하며 살고 있을까. 매일 머무는 공간에서 어떤 기억을 체득하고 있을까. 부부는 이곳에 어린 시절의 감각을 복구하고, 도시의 스케일과 감각을 부드럽게 집 안으로 들이려 했다.


거실 한복판의 날 선 금속 기둥과 주방으로 이어지는 비어 있는 동선이 대비를 이루며 아파트 특유의 단조로움을 지워낸다.

거실 한복판의 날 선 금속 기둥과 주방으로 이어지는 비어 있는 동선이 대비를 이루며 아파트 특유의 단조로움을 지워낸다.

기능적인 다운 라이트를 덜어내고 벽면을 따라 흐르는 은은한 간접조명을 선택한 것은 시각적 자극을 줄이고 공간의 평온함을 구현하기 위해서다.

기능적인 다운 라이트를 덜어내고 벽면을 따라 흐르는 은은한 간접조명을 선택한 것은 시각적 자극을 줄이고 공간의 평온함을 구현하기 위해서다.

박성민 소장은 노란 햇살이 드는 거실 한 편의 테이블에 앉아 책 이야기를 시작했다. 스틴 에일러 라스무센(S. E. Rasmussen)의 <건축예술의 체득 Experiencing Architecture>. 라스무센은 사람이 공간에서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깊이 탐구한 인문주의적 건축가이자 도시계획가다. 박성민은 이 책을 다섯 번 탐독했다고 한다. “학교에서 구조적이고 구성적인 것을 배웠다면, 이 책에서는 도시 안의 언덕이나 계단처럼 어린 시절에 감각적으로 체득했던 공간의 기억을 다시 보게 됩니다. 건축을 형태가 아닌 경험으로 볼 수 있도록 해준 바이블 같은 책이죠.” 그가 발견한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건축을 ‘눈으로 보는 형태’로 제한하지 않고 오감을 통한 총체적 경험으로 확장했다는 점이다. 비어 있는 공간, 기둥이나 창문의 배열이 이루는 리듬, 재료가 지닌 질감과 색채, 빛이 반사되는 방식, 울림과 적막함 같은 것들이 모두 우리 공간 경험을 완성한다는 이야기다.


별도의 구조체 없이, 한지 스스로 형태를 유지하도록 한 겹씩 바르고 말려서 만든 조명과 선반의 디테일.

별도의 구조체 없이, 한지 스스로 형태를 유지하도록 한 겹씩 바르고 말려서 만든 조명과 선반의 디테일.

부부의 집은 라스무센의 책을 통해 텍스트로 배운 철학을 삶의 궤적으로 끌어들인 결과물이자, 입체적 오마주 같다. “변하지 않을 풍경을 곁에 두고 살고 싶었어요. OFNN의 사무실은 지금 연희동에 있지만 창덕궁 인근의 원서동 정취를 좋아해서 그 동네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 역시 오랫동안 갖고 있었어요. 제가 남산 자락의 집을 고른 이유도 같은 맥락이죠.”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궁궐의 담장과 나무를 동경하는 그에게, 거실 창 너머로 보이는 한양도성의 아늑한 조명은 도시를 체득하는 가장 완벽한 프레임이 됐다. 거실의 창은 남동향, 주방과 서재의 창은 북서향으로 난 집. 박성민 소장은 한국 아파트 특유의 ‘남향 신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보다 빛이 재료와 만나는 방식에 집중했다. 거실의 큰 창은 최대한 프레임을 덜어내고 메탈릭 실버 컬러를 입혔다.


박성민 소장이 직접 만든 선반 ‘MD 1’이 놓인 거실의 한 편.

박성민 소장이 직접 만든 선반 ‘MD 1’이 놓인 거실의 한 편.

묵직한 석재 세면대와 거울을 통해 확장되는 공간을 대비시킨 침실의 세안 존.

묵직한 석재 세면대와 거울을 통해 확장되는 공간을 대비시킨 침실의 세안 존.

금속 선반과 따뜻한 나무 합판이 어우러진 주방.

금속 선반과 따뜻한 나무 합판이 어우러진 주방.

회색 도장이 아닌 실버를 선택한 이유는 명확하다. 빛을 받았을 때 금속의 경계가 번지며 프레임이 시각적으로 사라지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은은하게 스며드는 북서쪽의 빛이 메탈릭 실버 프레임에 닿아 경계를 무너뜨릴 때, 창은 도시 풍경을 집 안으로 삼투시키는 유연한 막이 된다. 빛에 대한 예민한 감각은 조명 계획에서도 두드러진다. 어릴 적 바닥에 누워 바라보던 거실 천장의 형광등이 괴로웠다는 그는 기능적인 다운 라이트를 최소화하고 대신 한지와 유리를 활용한 간접조명을 고안했다. 특히 서재와 거실 곳곳에 쓰인 한지 조명은 합판에 V자 코팅을 하고 한지를 발라 말리는 실험적 방식을 선택했다. 별도의 구조체 없이도 한지 스스로 형태를 유지하며 빛을 포근하게 머금는 이 디테일은 공예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을 보여준다. 대량생산된 주거 시설인 아파트의 규격화된 층고나 매끄러운 벽면에서 개인의 감각은 자주 거세된다. 박성민 소장이 이 건조한 상자에 공예적 디테일을 심은 이유일 것이다.


드레스 룸의 출입문에도 짜임새와 질감이 돋보인다.

드레스 룸의 출입문에도 짜임새와 질감이 돋보인다.

오묘한 청록빛이 감도는 묵직한 도자기 오브제.

오묘한 청록빛이 감도는 묵직한 도자기 오브제.

“OFNN의 작업은 크게 세 가지 축으로 이뤄집니다. 인체가 느끼는 편안한 치수를 고민하는 스케일, 불필요한 기둥을 줄이고 공간과 빛의 관계를 정의하는 구조 그리고 따뜻한 손길이 닿는 공예예요.” 부부의 집 역시 이런 OFNN의 문법 위에 고쳐 지어졌다. 거실 한복판에 자리한 육중한 금속 기둥은 이 집의 중심을 잡는 장승 같은 존재. 속이 비어 있는 파이프가 아니라 꽉 찬 솔리드 바를 깎아 만든 이 기둥은 아파트에서는 보기 드문 조형적 무게감을 준다. 박성민은 기둥에 실을 묶어 시각적 연결감을 줬다. 바닥재 역시 예사롭지 않다. 일본 여행 중 궁궐의 공간마다 달라지는 마루의 촉감에 영감을 얻은 그는 일반 아파트보다 훨씬 넓은 240mm 폭의 원목 마루를 깔았다. 시각적 확장감은 물론 맨발에 닿는 나무 질감이 공간마다 다르게 느껴지도록 의도한 스케일의 실천이다. 부부이자 건축가 동료로서 함께 집을 고치며, 그는 아내가 원하는 공간과 가구의 섬세한 스케일을 배우고 자신의 실험적 아이디어를 정제했다.


날렵하게 솟은 금속 기둥 중간 부분에 거친 로프를 감았다.

날렵하게 솟은 금속 기둥 중간 부분에 거친 로프를 감았다.

온전한 휴식을 위해 설계된 침실에는 여러 겹의 빛이 고요하게 감돈다.

온전한 휴식을 위해 설계된 침실에는 여러 겹의 빛이 고요하게 감돈다.

거실에 둔 블랙 컬러의 LC3 옆에는 그가 직접 만들고 ‘MD1(Mandarin Duck 1)’이라 이름 붙인 독특한 선반이 있다. 원앙처럼 마주보기도 하고, 때로는 분리돼 각자의 역할을 하는 이 가구에는 부부의 위트가 담겨 있다. “아내와 싸우면 선반을 반대로 돌려놓으려 했는데, 옮기기 귀찮아서 안 싸우게 됩니다”라며 웃는 그에게서 공간을 대하는 여유가 느껴진다. “매일 새벽 서재에서 도시 풍경을 바라보며 글을 씁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집에서의 순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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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이경진
  • 사진가 최용준
  • 아트 디자이너 김진림
  • 디지털 디자이너 김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