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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은 영화관과 달리 영상이 끝나기 전에 언제든 자리를 뜰 수 있다. 그런데 <김희천: 두더지들>에서는 좀처럼 시선을 거두기 어렵다. 관람객을 끝까지 붙잡아두는 힘은 어디에서 오나
2023년 이후 여러 작품을 한 공간에 놓았다는 점에서 다르고, 규모 면에서도 큰 전시다. 그렇다고 관람객 반응을 크게 의식하는 편은 아니다. 사람들이 내 작업을 너무 쉽게 이해하고 동의한다면 오히려 뭔가 잘못됐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 정확히 포착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붙잡아보는 게 목적이니까. 다만 관람자가 내 영상을 끝까지 보는지는 신경 쓴다. 미술관에서는 언제든 나갈 수 있지 않나. “미술관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본 첫 영상 작품”이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다.
‘커터3’와 ‘더블포져’는 각각 서로 다른 가상세계와 인물을 따라가는 작품이다. 두 작품에 이스터 에그처럼 숨어 있던 두더지는 신작 ‘레몬’에서 이야기의 중심에 놓인다. 전시 제목도 ‘두더지들’이고. 왜 두더지인가
어느 순간 ‘언더그라운드가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흥미로운 것이 생겨도 금세 알려지고 연결되면서 모든 것이 밖으로 노출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땅 아래 사는 두더지가 떠올랐다. 영상 작업을 하는 입장에서 두더지는 재미있는 존재다. 갑자기 땅속으로 사라졌다가 전혀 다른 곳에서 나타날 수 있으니까. 이야기의 인과관계를 따르지 않아도 그런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내 작업에도 ‘두더지적인’ 속성이 있었으면 했다. 모든 것을 하나의 논리로 연결하기보다 작은 어긋남을 남겨두는 것. 관람자가 ‘도대체 왜?’라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 말이다. 실제로도 두더지를 좋아한다. 귀엽지 않나(웃음).
2023년 ‘커터3’와 ‘더블포져’, 최근작 ‘레몬’은 게임 엔진 유니티로 만든 자동 재생 게임이다. 관람자가 ‘플레이할 수없는 게임’이라는 형식을 택한 이유는
게임에서는 캐릭터가 내 조작에 따라 움직인다. 그걸 차단하고 싶었다. 내가 정말 원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하는 건지, 아니면 기술이 만든 환경에서 경험하는 건지 모호했다. 그렇다면 플레이한다는 감각을 없앤 상태에서도 이것을 게임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게임 엔진(유니티)으로 제작된 자동 재생 게임 형식의 작품 ‘커터3’(2023)과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공개한 신작 ‘레몬’(2026).
‘레몬’에서 두더지 ‘버터’는 나무에서 떨어진 레몬을 자신과 같은 존재로 여기며 돌본다. 두 작품을 연결하기 위한 설정에서 출발한 이야기에 어떻게 지금과 같은 관계와 감정이 생겨났나
‘레몬’이 처음 해야 했던 역할은 ‘커터3’와 ‘더블포져’를 연결하는 것이었다. 두 작품에 등장하는 두더지가 땅굴을 파며 두 세계를 오간다는 설정이 있었고. 역할이 정해져 있으니 오히려 나머지는 내 취향대로 자유롭게 만들 수 있었다. ‘더블포져’의 주인공 침대 옆에 붙인 포스터에 두더지를 뜻하는 ‘Mole’의 철자를 뒤섞어 ‘Lemon’이라고 쓴 적 있다. 나는 제목을 먼저 정하는 편이라 이번에도 ‘레몬’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실제로 레몬을 등장시키고 싶었다. 양끝이 뾰족한 모양도 묘하게 두더지처럼 보였다. 두더지가 레몬을 자기와 같은 존재 혹은 친구라고 생각하면 짠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레몬은 결국 썩고, 두더지는 그 일을 금세 잊어버린다. 그렇게 살을 붙이다 보니 결국 슬픈 작업이 됐다(웃음).
두더지와 마찬가지로 배우 이찬종 역시 ‘커터3’와 ‘더블포져’에서 목소리로, 2024년 아틀리에 에르메스 개인전 <스터디>에서 선보인 동명의 작품 ‘스터디’에서는 배우로, ‘말린’에서는 다시 이미지와 목소리로 등장한다
처음부터 한 캐릭터를 통해 작품을 연결하려는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다. 작업을 이어가다 보니 누군가 연기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그러다 2023년 이찬종 씨와 처음 작업하면서 배우가 하나의 인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꽤 재미있다는 걸 알았다. 내 작업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과정도 필요했지만, 계속 함께하다 보니 빠르게 이해하는 부분도 생겼다. 다만 작품 속의 이찬종이 일관된 캐릭터일 필요는 없었다. 관람자에게 작품이 연결돼 보일 수 있다는 것도 안다. 다만 그걸 개념적 전략으로 삼았다기보다 이찬종 씨의 얼굴과 연기적 역량이 좋고, 내 작업방식과 잘 맞아서 자연스럽게 협업이 이어졌다.
주인공 찬종이 집에서 플레이하는 비디오 게임으로 전개되는 ‘커터3’(2023).
생성형 AI로 만든 4채널 영상 ‘말린’에서 이찬종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 온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어느 날 어떤 영상이 AI가 아니라 실제 촬영된 것임을 증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촬영을 많이 해본 사람이라면 생성된 이미지를 보면서 실제로 어떻게 촬영했는지 역으로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자연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설정을 붙이니 ‘있는 그대로 자연을 찍는다’는 믿음과 실제 다큐멘터리의 연출 문제, 나아가 기술이 우리를 어떻게 매개하는지조차 인식하기 어려운 ‘기술의 자연화’에 이르기까지 여러 이야기를 가져올 수 있었다. 작품에서는 AI가 만든 가짜를 찾아내는 게 아니라 어떤 영상이 실제로 촬영됐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면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누가 이런 부탁을 하는가’ 같은 질문이 계속 생긴다. 어떤 답을 요구하는 난제를 던졌다기보다 ‘난제처럼 보이는 것’을 던진 것이다.
‘말린’ 제작에도 생성형 AI를 사용했다. 기존 방식과 프레임에서 벗어난 경험은 이번 작업과 어떻게 연결됐나
분명 기존 작업방식이나 압박에서 조금 벗어났다.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에서 출발해 만들면서 생각하는 방식에 가까웠다. ‘말린’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 생성형 AI가 무엇인지 알려면 직접 써서 만들어봐야겠다고 여겼다. 직접 사용해보니 몇 장의 사진으로 그 사람이 할 법한 동작까지 만들어내는 게 놀라웠다. 적은 정보로 한 사람을 시뮬레이션하는 느낌이었다. 반면 작업 과정은 그다지 유쾌하진 않았다. 촬영하다 보면 계획하지 않았던 장면이 우연히 찍히기도 하고, 처음에는 쓸 생각이 없던 장면이 다시 봤을 때 좋아지기도 하지 않나. 그런데 AI 이미지는 결과를 보는 순간 거의 바로 쓸지 말지를 판단할 수 있다. 작업을 나를 다른 곳으로 이끄는 게 아니라, 그 결과를 내가 계속 끌고 가야 한다는 느낌이었다.
2023년부터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5000여 장의 사진 중 100여 장을 선별한 작품 ‘.dng’.
반면 ‘.dng’는 2023년부터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5841장의 사진 가운데 일부를 선별한 작업이다. 게임 엔진과 생성형 AI 이미지 사이에 직접 찍은 사진을 놓은 이유는
게임 엔진으로 만든 작업이나 ‘말린’은 이미지가 비교적 빠르게 파악된다. 반면 사진은 같은 대상을 두세 장 찍어도 미묘한 시간과 구도 차이 때문에 어느 것이 더 좋은지 결정하기 어렵다. 나는 그게 사진의 풍부함이라고 생각한다. 사진을 다시 보니 ‘내가 걸어 다니면서 이렇게 많은 걸 보고 있구나’ 싶었다. 일상에서 눈에 띈 것을 스마트폰으로 기록한 것이지 않나? 그 시선을 다시 들여다보면서 이상한 생명력도 느꼈다. 전시장에서 이 사진들이 숨통을 틔워주는 역할을 해줄 것이라 봤다.
이번 전시는 2023년 이후의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2023년은 작가에게 전환점이 된 해였나
스스로에게 너무 관심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기술이 매개하는 환경에서 너무 손쉽게 일관된 사람으로 설명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러면서 ‘내가 나를 나라고 느끼는 건 무엇인가’ ‘느닷없이 개연성 없는 내가 될 수 있을까?’ 같은 질문이 생겼다. 이전에는 ‘세계는 이렇게 생겼다’고 설명하는 작업을 했다면, 2023년부터는 우리가 공유하면서도 정확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데 관심을 갖게 됐다.
생성형 AI로 만든 신작 ‘말린’.
2015년 첫 영상 작업 ‘바벨’ 이후 10여 년이 흐른 지금, 변하지 않은 것과 달라진 것은
변하지 않은 건 관람자가 내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봤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지금껏 영상이라면 의미나 미술적 가치 이전에 끝까지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기술을 바라보는 방식은 달라졌다. 2018년부터 ‘기술이 비가시화되고 있다’고 느꼈다. 기술이 우리를 매개하지만 방식은 점점 인식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좋은 기술일수록 걸리적거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작동하니까. AI도 언젠가는 굳이 AI라고 부를 필요조차 없는 인프라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때는 기술을 둘러싼 질문도 달라질 것이다.
지금 관심 있게 바라보는 것
아시아 남성의 이미지에 관심이 있다. 거창하게 남성성이나 성 정치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강한 남자’ 이미지가 많이 유통된다는 게 신기하다. 그 주변에는 여성 혐오적이거나 퀴어 혐오적인 콘텐츠도 많아서 복잡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당신의 언어로 지금 작업을 설명한다면
기술 환경에 둘러싸인 우리가 공유하는 감각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오히려 부정확해지고 미끄러진다. 나는 그걸 시각언어로 설명해 보고 싶었다. 우리가 자신과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는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다.
10년 넘게 작업을 이어온 지금 ‘계속 재미있게 작업할 수 있는가’도 중요한 문제일 것 같다
지금껏 억지로 한 작업은 거의 없었다. 지긋지긋했던 순간은 있어도 결국 재미있게 해왔다. 이제는 어떻게 유지할지가 중요하다. 작업하는 사람이 즐거워야 보는 사람도 받아들일 수 있다. 결국 그 즐거움을 계속 지켜가는 것과의 싸움이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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