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한 권의 책을 만나기까지
당신의 눈에 이 책은 어떻게 보일까, 아름다울까, 쓸쓸할까, 리듬이 흐르고 목소리가 들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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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엽
̒1984Books’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책을 만들고 사진을 찍는다. 
©unsplash
이 일을 하기 전, 나는 여러 해 동안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았다. 그때마다 가방 속에는 카메라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신발을 신고 집 밖을 나서기 전, 서재로 이용하는 현관 옆 벽장 속에서 두 권의 책을 골라 가방에 넣는다. 어깨를 짓눌러 왔던 카메라의 무게는 종이의 무게로 대체됐다. 무언가를 보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 ‘본다’는 행위는 다르지 않다고 믿지만, 가끔 이런 변화가 너무 오래된 것 같아 불안하기도 하다. 언젠가 다시 카메라를 들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벽장 속에 숨겨진 내 서재는 한때 나름 정교한 기준으로 쌓아 올린 건축물이었으나 지금은 무너진 폐허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날마다 무너진 돌무더기 사이에서 내 시선을 빼앗는 책들이 있다. 오늘 나와 함께할 동반자는 한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소설. 어차피 다 읽지 못할 걸 알지만 습관적으로 가방에 넣는다. 마치 다 찍지 못할 걸 알면서도 챙기던 여러 통의 필름처럼. 내가 사는 곳에서 파주까지 차로 네 시간이 걸린다. 저장해 둔 플레이리스트가 한 바퀴 돌고 나면 다음에는 오래도록 청취해 왔던 팟캐스트를 튼다. 익숙한 연주곡을 배경으로 평론가의 낭독이 시작되는 순간은 이 길을 다니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언제나 그렇듯 또다시 그의 목소리에 빠져든다. 때론 책을 읽을 때 머릿속으로 그의 목소리가 울리는데, 그럴 때면 목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쓴다. 나는 혼자 오랜 시간을 보내왔다. 이야기를 전하는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 건 내게 흔한 일이 아니다. 책 만드는 일도, 책 읽는 일도 대부분 침묵과 고독 속에서 이뤄진다. 책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하지만 몇몇 책은 그 일을 해낸다. 리듬이 흐르고 목소리가 들린다.
도착할 즈음부터 차창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것은 좋은 신호일까.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오늘 인쇄할 책의 운명을 미리 암시하는 것 같다. 이 일을 한 지 8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두려움에 휩싸인다. 나는 실수의 근원과 크기를 예측할 수 없다. 지난번에는 페이지가 섞이는 제본 사고가 있었다. 내 잘못은 아니었지만 책임은 내게 있다. 사람이 하는 일이고 실수와 함께하는 법을 배워왔다. 하지만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릴 만큼 심각한 것이 아니기를 바랄 뿐. 한 시간 전에 미리 도착해 인쇄소 근처 카페에 들러 가방 속의 책을 꺼내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친다. 그 안에서 리듬을 느끼고 목소리를 듣고 맛을 본다. 이것이 내가 얻을 수 있는 평화 한 조각. 책 만드는 일이 때로는 전쟁이라면, 책 읽는 일은 피난처가 되기도 한다. 나를 무너뜨리는 것도, 살리는 것도 결국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감리는 어려움 없이 20분도 되지 않아 끝난다. 이제 용지 한 장을 챙겨 나와 다양한 빛에 비춰본다. 인쇄소 조명 아래 있을 때와 햇볕 아래 있을 때, 또 그늘 아래 있을 때 책은 모두 다르게 보인다. 이 책을 마주하고 있을 당신을 상상한다. 서점의 형광등 아래에서, 햇살이 들어오는 카페의 창가 테이블에서, 침대 옆 은은한 빛에 둘러싸인 협탁 위에서, 산책길에 쥔 오른손에서. 당신의 눈에 이 책은 어떻게 보일까, 아름다울까, 쓸쓸할까, 리듬이 흐르고 목소리가 들릴까.
다시 네 시간이 걸려 집으로 돌아온다. 20분을 위해 여덟 시간을 운전한 것처럼 보이지만, 책 한 권의 탄생에 비하면 짧은 시간이다. 거실 소파에 앉아 숨을 고르는 사이 집을 나설 때와 비슷한 어둠이 다시 찾아온다. 이제 책은 내 손을 떠나 제 운명을 걸으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느끼기 시작한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잔을 채우고 책상으로 돌아간다. 문자들로 가득한 화면과 흩어진 종이들이 나를 기다리는 곳으로, 새로운 책의 탄생을 준비하는 곳으로. 이곳이 내 자리다. 책을 만들고 파는 일이 곧 나의 생계라는 의미에서도 이곳이 상처 입고 피 흘리는 전쟁터라는 말은 지나치지 않다. 그래도 괜찮다. 구겨지고 더럽혀진 날개를 펼치고 새는 다시 날아갈 것이므로. 그 날개 아래를 피난처 삼아 나는 다시 잠들 것이므로.
Credit
- 에디터 윤정훈
- 아트 디자이너 김강아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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