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예가의 60년 세월에 펼쳐진 놀라운 도예의 세계
도예가 루시 리의 조용한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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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저를 현대 도예가라고 생각하는지, 전통 도예가라고 생각하는지 묻는다면 저는 대답할 것입니다: 모르겠고, 상관없습니다. 살아 있는 예술은 나이와 상관없이 언제나 현대적입니다. 예술 이론은 저에게 의미가 없고, 아름다움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제 모든 철학입니다.
세인즈버리 센터의 루시 리 아카이브에 보관 중인 1951년의 메모는 도예가 루시 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고스란히 드러낸다.



1982년에 제작된 27cm 높이의 스톤웨어 화병. 흰색 유약을 바르고 황금색 망간 테두리를 둘렀다. 프라이빗 컬렉션.
루시 리에 관한 책을 읽다 보면 그의 성격을 다룬 일화를 자주 발견한다. 리는 자신의 예술에 대해 간결하게 말하기로 유명했다. 아카이브에는 작업에 관한 단서를 거의 두지 않았고, 스튜디오도 마찬가지다. 고향인 비엔나 그리고 런던에 있던 루시 리의 작업실은 순전히 기능적 공간으로 보인다. 다른 예술가들이 영감의 원천 혹은 내밀한 셸터로 작업실을 꾸민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그는 자신을 소개해야 할 때마다 단지 “도예가”라고 말하는 사람, 자신의 직업을 그렇게 단언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리가 60년 넘는 작업 여정에서 이뤄낸 것을 보면 이는 지나친 생략이다. 루시 리는 남성 위주의 20세기 도예 신에서 손꼽히는 여성이었다. 도자기를 만들고 보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은 기술로 수천 개의 독창적 작품을 만들었고, 방대한 기술 지식과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접근방식을 갈고닦으며 독립적 위치에서 경력을 쌓았다. 특히 리는 당시 유럽의 모던 운동 혹은 조각적이거나 추상적인 형태보다 그릇과 꽃병, 식기처럼 ‘유용한’ 도자기에 헌신하는 작업에 관심이 있었다. 자신을 그저 도예가라 소개했듯 사사롭지 않고 객관적인 단순미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명료한 형태와 형태에 완전히 통합된 표면 효과, 상징적인 그라피토 패턴의 정교함, 생동감 넘치는 색과 활력도 놀랍지만 루시 리의 진정한 예술성은 작품이 지닌 신묘한 기운에 있다. 그 작은 사물에 담긴 절제와 평온함, 응축된 힘은 루시 리가 어떤 실패와 좌절에도 다시 점토 앞에 앉아 자신이 정한 길을 따라 작업을 연마한 결과일 것이다. “도자기 작업은 나에게 모험이며, 모든 새로운 작품은 새로운 시작입니다(To make pottery is an adventure to me, every new work is a new beginning).” 리가 남긴 말을 따르기라도 하듯 그가 작고한 지 20여 년이 지난 현재 루시 리의 작품은 세계 곳곳을 돌며 모험 중이다.



지금 그의 작품이 머물고 있는 곳은 바로 덴마크의 미델파르트(Middelfart). ‘클레이 뮤지엄 오브 세라믹 아트 덴마크(Clay Museum of Ceramic Art Denmark)’에서 루시 리의 작품 200여 점을 선보이는 전시 <Lucie Rie: The Adventure of Pottery>가 열리고 있다. 다양성과 우아함, 실험성, 독특한 업적이 담긴 루시 리의 놀라운 작품세계를 재조명하는 전시로, 2023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케틀스 야드와 티사이드(Teesside) 대학교의 일부인 MIMA가 배스의 홀번 박물관과 협력해 열었던 동명의 오리지널 전시가 바탕이 됐다. 이 전시의 공동 큐레이터이자 케틀스 야드의 보조 큐레이터인 엘리자 스핀델(Eliza Spindel)은 이렇게 말한다. “루시 리의 작품에는 민속예술에 대한 향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스타일은 현대건축을 의식하는 사람의 것이었죠. 루시 리의 대단한 지지자였던 건축가 요제프 호프만은 자신의 건축물에서 그녀의 도자기를 전시하기도 했습니다. 루시 리의 일대기에서 이러한 현대건축의 연관성은 반복적으로 강조됩니다. 엄격한 그래피티 선으로 얇고 정확하게 설계된 1950년대의 포츠(Pots)들은 도시적 환경에서 만들어졌어요. 당시 영국에는 ‘대도시 도예가’와 ‘시골 도예가’라 불리는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영국 스튜디오 도자기의 아버지라 불린 버나드 리치(Bernard Leach)는 후자였죠. 전자가 바로 루시 리입니다. 그는 ‘대도시 도예가’였죠.” 버나드 리치가 큰 영감을 얻어 구매한 조선의 달항아리를 루시 리에게 선물해 리의 스튜디오에 놓을 정도로 버나드 리치와 루시 리는 꽤 돈독한 사이였다. 하지만 작업 방향은 서로 달랐다. 버나드 리치는 소박하고 동양적인 작업을, 루시 리는 섬세하고 모더니스트적인 작업을 이어갔다.



다양한 점토와 유약을 사용해 혁신적 기술을 선보인 루시 리는 때로 재료를 조합해 구울 때 거품이 생기거나 녹는 유약을 만들고, 때로는 날카로운 바늘로 그릇 표면에 미세한 선을 그렸다. 대조되는 점토를 여러 개의 공으로 던져 물레의 회전 동작을 반영하는 나선형 색상을 연출하기도 했다.
리는 당시 도예가 사이에서 유행하는 장식용 그릇 형태와 비유적인 도자 조각에 대한 취향을 완전히 거부했고, 현대건축에서 표현되는 미니멀리즘에 관심을 보이며 대응했다. 효율성을 추구하고 형태를 단순화했으며, 건물 구조에서 파생된 장식성을 작업에서 구현하기도 했다. 이는 도예 신에서 전례가 없는 접근방식이었다. 도예가라면 화덕 가마를 사용하고 자연 속에서 점토와 교감을 나누는 것이 당시 풍조였지만, 늘 도시에 머물며 전기 가마로 작업했다는 사실에서도 효율을 중요시했던 루시 리의 ‘대도시 도예가’적 방식이 잘 드러난다. 큐레이터 엘리자 스핀델은 이렇게 덧붙인다. “루시 리는 철저히 외부 영감의 원천을 두려워하지 않은 예술가지만, 그의 아카이브에는 자연에 대한 리의 관심을 보여주는 몇 가지 작은 단서가 보관돼 있었습니다. 자연세계의 자연물들이죠. 세인즈버리 센터 아카이브에는 그의 집과 스튜디오에 있는 물건 중 작은 유기물 오브제로 구성된 컬렉션이 있습니다. 자갈과 미네랄, 수정, 조개, 산호, 깃털 등이죠. 루시 리가 직접 언급한 적은 없지만 이 작은 자연물을 일종의 영감의 원천으로 간직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녀의 일부 작업에서 발견할 수 있는 반짝거리는 질감과 관련해 생각해 보면 꽤 신나는 일이에요. 1930년대 초반까지 리의 작업 전반에 걸쳐 볼 수 있었던 자연세계의 영향은 그가 패션 업계를 위해 만든 단추에서도 볼 수 있죠.” 한때 루시 리는 생계를 위해 주요 패션 하우스의 오트 쿠튀르 피스를 위한 독특한 세라믹 단추를 제작했고, 그는 이 일을 즐기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도자기로 충분한 돈을 벌 수 있게 되자마자 단추 제작을 그만뒀다.

루시 리의 단추 시리즈.

핀란드의 ‘클레이 뮤지엄 오브 세라믹 아트’에서 열린 전시 <Lucie Rie: The Adventure of Pottery>.
하지만 그 자체로 보석 같은 그의 아름다운 단추 시리즈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 작은 도자기 조각에 루시 리의 작업이 응축돼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점토와 유약의 재료적이고 원소적인 퀄리티에 매료됐던 루시 리, 학생 시절에는 공책에 유약 실험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화학 공식을 끝없이 적어갔던 루시 리, 대도시에서 살고 작업하며 자연세계에 끝없는 관심을 두었던 루시 리. 리는 이후 결국 미술의 길로 접어들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성 정체성이나 여성의 사회적 역할, 전통적인 작업방식과 관습에 대한 도전이 이뤄지던 실험적인 배경 속에서 미술학교에 다녔다. 이 모든 것이 루시 리가 유일무이한 도예가로 우뚝 서는 배경이 됐을 것이다. 루시 리의 도자기는 지금도 국제 경매 기록을 경신 중이다.
Credit
- 에디터 이경진
- 아트 디자이너 이유미
- 디지털 디자이너 김지은
- COURTESY OF LUCIE RIE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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