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ETY

유숙열의 '뉴욕 페미니즘 리포트', 35년 전 뉴욕에서 오늘의 K페미니즘까지

페미니즘은 유숙열에게 자신 그 자체다.

프로필 by 전혜진 2025.08.12
재킷과 셔츠, 플라워 패턴 타이와 슈즈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재킷과 셔츠, 플라워 패턴 타이와 슈즈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대한민국 1세대 페미니스트로 삶 자체가 역사입니다. 1980~1990년대에 경험한 뉴욕 페미니즘을 기록한 책 <유숙열의 뉴욕 페미니즘 리포트>가 이제 세상에 나왔다는 게 흥미로워요

35년 전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책이죠. 시작은 흑인 페미니스트 시인 오드리 로드를 기억하는 것이었어요. 한참 쓰는데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 선포됐습니다. 45년 전 선배 기자를 숨겨주고 비상계엄 포고령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옥중 고문을 받고 해직당한 기억이 갑작스럽게 떠올라 몸서리쳤어요.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내 경험을 꺼냈어요. 오드리 로드라는 페미니스트와의 만남은 물론, 뉴욕에서 기자로 일하며 쓴 칼럼과 그때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엮었죠. 요즘 사람들이 자꾸 제게 페미니즘이 뭐냐고 묻습니다. 아직도 개념 정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나만의 페미니즘을 정리해 보고 싶은 욕망이 컸던 것 같아요.


해직 기자가 된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당신은 1984년 10월, 여성학 개척지이자 페미니스트 대학으로 정평이 난 헌터 칼리지에서 오드리 로드를 만났습니다. 그를 어떤 여성으로 기억하나요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어요. 시 수업도 아닌 ‘여성과 정치 변화’라는 여성학 수업에 그가 참관했는데, 저는 처음으로 시를 발표하는 날이었어요. 유일한 동양인 여성으로서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쓰자 싶어 ‘황인종 여성이 쓴 시(Poem by A Yellow Woman)’를 발표했는데, 그가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자신의 시 워크숍을 권하더군요. 그때부터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이후로도 그의 수업에서 인종차별과 성차별에 분노하며 ‘용의 해(Year of the Dragon)’라는 시를 썼는데, “너의 페니스를 잘라 누구도 다시는 강간하지 못하게 만들고 싶다”는 구절을 읽자마자 남자애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자신의 하얀 피부를 지칭하며 저를 격렬하게 겁박했죠. 그때 오드리 로드는 “미국은 전 세계를 강간하고 있다(America is raping the whole world)”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이후 동양 여성이나 제3세계 여성, 또 다른 소수자들의 안전을 위해 본인이 지정한 사람만 들어올 수 있는 클래스를 만들었어요. 그러니 제게는 ‘페미니스트 마더’라고 할 수밖에 없는 분이고, 해직 기자로 미국에 건너가 페미니즘을 공부하게 된 건 어쩌면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한 게 아니었나 싶어요.


그 일화도 흥미로웠습니다. 시 센터 개원식에서 오드리 로드는 당신에게 시를 낭독하게 했고, 여전히 겁에 질려 있던 유숙열에게 “침묵은 너를 보호하지 못한다. 너는 들려져야 할 목소리를 갖고 있다”고 얘기했다죠.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 이 말은 어떻게 들릴까요

여전히 유효하죠. 오드리 로드는 페미니스트의 범주에서도 엄마이고, 흑인이고, 레즈비언이고, 시인이고, 암 생존자였습니다. 당대 페미니즘의 주류 흐름에서도 복합적으로 얽힌 정체성 문제에 의문을 제기했어요. 저 또한 미국으로 이주한 동양 여성이자 엄마이면서 학생이고 노동자였습니다. 그는 “만약 내가 자신을 정의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의 환상에 의해 산산조각 나고 잡아먹힐 것”이라고 했는데, 그의 시는 사치가 아니라 생존 문제였어요. 그래서 첫 번째 챕터에 그에 관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그룹 ‘레드스타킹’의 캐시 세라차일드와 유숙열.

그룹 ‘레드스타킹’의 캐시 세라차일드와 유숙열.

지금 당신이 그 말을 꼭 해주고 싶은 여성이 있나요

지금 젊은 여성들, 특히 페미니스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아요. 근데 그게 간단치 않더군요. 나는 페미니즘을 여성의 ‘인간 선언’이라 생각했고, 1997년 창간한 페미니즘 저널 <이프>의 컨셉트를 ‘여성의 욕망을 아는 잡지’로 잡았어요. 욕망의 페미니즘을 추구하며 내 얼굴을 걸고 사회 부조리를 꼽아내 재미난 이야기판을 벌였는데, 지금 젊은 페미니스트들의 사정과는 너무 다른 거예요. 2018년 혜화역 불법촬영 시위 때 얼굴을 가린 어린 여성들을 보며 깨달았죠. <아직, 메갈리안>이나 <근본없는 페미니즘(메갈리아에서 워마드까지)> 같은 책도 우리 출판사에서 발간했지만, 아직 내가 그들에게 해줄 이야기를 찾지 못했습니다. 지금 여성들은 의견 피력만으로도 안전에 위협을 느끼니까요. 우리가 서로 만나는 지점이나 기회가 잘 없는 것 같아요. 그저 여성들이 다양한 인생의 형태를 즐겼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인데 말이죠. 어쨌든 여성의 욕망이 제대로 발현돼야 그 사회가 잘돼요. 인간을 살게 하는 건 욕망이지 도덕심이 아니거든요. 여성의 욕망 추구가 자연스럽게 여겨져야 해요.


페미니스트로서의 행보가 성장 환경에서도 영향을 받았을까요

26세에 남편과 사별한 엄마는 저를 낳고 과부가 됐어요. 아빠 없는 제가 불쌍했는지 제약 없이 자유롭게 키워주셨어요. 그리고 재혼하셨죠. 비록 아버지와 성은 달랐지만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았어요. 그럼에도 엄마는 자꾸 본인을 죄인이래요. ‘일부종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데, 어린 저는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우리 엄마가 무슨 죄를 지은 거야?’라고 의문을 가졌어요. 그 손가락질이 결국 재혼 때문이란 걸 알고 나서 칼을 갈았어요. 그러다 미국에 갔는데, 페미니즘 공부하는 애들이 ‘마이 스텝파더’ ‘마이 스텝마더’ 같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거예요. 저는 평생을 숨기고 괴로워했는데. 그래서 나는 죽어도 페미니스트가 돼야겠다 싶었습니다. 여성의 욕망을 추구하는 페미니즘을 반드시 해야겠다고요.


책에서는 한국과 미국, 두 문화 사이에서 체감한 페미니즘의 다른 결을 두 번째 챕터이자 <여성신문> 시리즈 기사를 아카이빙한 ‘미국 여성운동의 현장과 그 후 35년’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결을 체감한 강렬한 순간이 있다면

당시에는 여성운동이 민주화운동에 종속된 부속품처럼 여겨졌고, 독자적으로 여성운동을 할 수 없던 시절이었어요. 사실 여성단체에 있던 사람들은 귀고리를 하는 것도 불편하게 여길 정도로 일부만 존재를 인정받았는데, 그때 미국 여성들은 가장 강력한 형태로 독자적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뉴욕에는 ‘세컨드 웨이브 페미니즘’이라고 불릴 만큼 굉장히 앞서나갔던 여성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걸 기록했어요.


 지난 5월 발간한 유숙열의 <뉴욕 페미니즘 리포트>.

지난 5월 발간한 유숙열의 <뉴욕 페미니즘 리포트>.

그때 <미즈> 매거진 편집장 로빈 모건, 여성운동의 본산지 NOW 대표 멜로디 바한과의 인터뷰, 프리다 칼로의 전시장 방문 등 1980~1990년대 미국 여성운동의 흐름이자 당시 뉴욕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여성운동단체와 페미니스트들을 만났습니다. 여전히 마음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취재원이자 여성이 있다면요

1969년에 결성된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그룹 ‘레드스타킹’을 취재하며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을 인터뷰할 수 있을지 물었는데, 그가 정신병원에 있어서 응할 수 없을 거라는 답을 들었어요. 그리고 2012년 뉴욕 이스트 빌리지의 아파트에서 그는 죽은 채로 발견됐죠. 스물다섯 살에 선구적 페미니즘 이론서 <성의 변증법>을 쓰자마자 단번에 유명해진 데다 유대인 아버지와 갈등이 이어지는 과정에서 생이 끝난 거예요. 제게는 여전히 가슴 아픈 일이죠. 법적 평등을 우선시했던 다른 여성운동가와 달리 그는 ‘생물학적 가족의 압제’로부터 자유를 설파하며 인공 생식으로 태어난 아이들을 공동체 가구에서 키우는 용감한 신세계를 그렸습니다. 너무 앞서나갔던 이론이자 지금 통하는 이론입니다. 그리고 제2차 페미니즘 물결을 만든 <섹슈얼 폴리틱스>의 저자 케이트 밀레트도 기억에 남아요. 1997년 <이프> 창간호에서 ‘지식인 남성의 성희롱’ 특집을 쓸 때 문단 권력의 중심에 있던 남성 작가들을 대상으로 문제 제기를 하는 과정에서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뉴욕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가 돌이켜봐야 할 건 무엇일까요? 미국과 한국의 페미니즘 결의 격차가 줄었다는 생각도 드나요

변화하거나 진보한 면은 분명히 있다고 봐요. 확실한 건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 자신이 원하는 걸 세상에 얘기하기 시작했고, 남녀 갈등과 혐오는 여전히 크지만 미러링이라는 굉장히 좋은 전략을 실현했고요. 언제나 그 시점을 살아가는 페미니스트들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 거예요. 우리는 영리하게 나아가고 있어요. 지금은 ‘K페미니즘’이라는 이름도 붙었습니다. 한국 페미니즘도 세계의 페미니즘을 선도할 가능성은 충분한데, 참으로 헛소리가 많아 오히려 수면 아래로 내려가 조용한 상태인 것 같아요. K푸드, K드라마 모두 인기지만 페미니즘에서도 한국 여성들이 강하다고 느껴요. 세계의 페미니티를 이끌 수 있는 저력이 있어요.


 ‘오드리 로드 여성 시 센터’ 개원식 사진.

‘오드리 로드 여성 시 센터’ 개원식 사진.

당신은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1997년 창간해 2006년에 완간한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 출간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대한민국 페미니즘 역사에서 빼고 얘기할 수 없는 존재죠. 억대 돈을 쏟아부었지만 그때 가장 신나셨다죠? 지금 돌이켜보면 어떻습니까

그때는 다 같이 미쳤던 것 같아요. 페미니스트 잡지라는 컨셉트를 꽤 오래전부터 잡아가고 있었죠. 그러다 1997년 봄, 이문열 작가가 현모양처 이미지를 이상화한 <선택>이라는 소설을 발표했고, 이에 공지영·이경자·은희경 등의 여성 소설가들이 작품 속 여성상에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우리도 더는 늦추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페미니스트에 대한 도전이니까 우리 커뮤니티가 집단으로 응전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지식인 남성의 성희롱’이라는 특집으로 이문열, 송기원, 김원우, 김완섭 등 대표 4인의 남성 작가 글을 페미니즘적으로 비판했습니다. 그러자 너무 많은 사람이 밀려들어 원고를 쓰거나 객원 기자를 하겠다고 나섰어요. 점차 운동이 돼갔고, 독자 편지마저 쏟아지며 신났습니다. 저는 그때 가장 신나고 행복하게 페미니즘을 실천했어요.


행복하게 실천했던 페미니즘이군요. 당시 독자들에게 받은 편지 중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이 있나요

어느 남성이 감옥에서 보낸 편지도 있었고, 40대 아들이 70대 늙은 엄마의 시를 소개하고 싶다는 편지도 기억에 남아요. 남성 독자들이 꽤 있었어요. 남성들의 육아 에피소드도 만화로 다루기도 했죠. 재미있고 행복하게 했습니다. 출산 파업 문제, 여자 군대 문제, 간통죄 문제, IMF 때 집 나가는 여자들까지. 물론 여전히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니 사람들이 <이프>를 더 기억해 주는 것 같아요.


요즘 여성들은 ‘지금 이곳의 페미니즘’에 관해 혼란을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생각이 불분명해지기 쉬운 시대니까요. 당신이 이주 여성으로서, 동양인으로서, 다시 모국에 돌아온 여성으로서 봐온 것들을 집대성한 책이 지금 끊임없는 자기검열에 들어간 어린 여성들에게 어떻게 다가가길 바라십니까

그냥 재미있게 읽어줬으면 좋겠어요. 무엇이든 재미있게 읽으면 메시지가 되는 거죠. 그저 소통하는 일이니까요. 저는 페미니즘에 전부를 걸고 살아온 사람이나 마찬가지인데, <이프>를 ‘페미니스트 저널’이라고 이름 붙인 것 또한 내 고집 때문이었어요. 당시 국내에서는 여성주의나 여성운동이라는 표현은 있었지만, 페미니스트라는 말은 안 썼어요. 와서 보니 이상하더군요. 내용은 다 페미니즘인데 말이죠. 이 책 제목을 <뉴욕 페미니즘 리포트>라고 정한 것도 페미니즘이 나를 해방시켰기 때문이에요. 당시에도 페미니즘을 중산층 여성의 한가한 놀음이라고 비난한 남성이 많았는데 말이죠. 지금의 젊은 페미니스트들은 그렇지 않더군요. 페미니즘이라고 쓰고 페미니스트라고 명확하게 얘기해요. 페미니즘의 이름은 명백히 페미니즘이 맞아요.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 완간호. 쿠바 여성 작가 아나 멘디에타의 작품.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 완간호. 쿠바 여성 작가 아나 멘디에타의 작품.

여성이 글을 쓰는, 그 여전한 힘은 무엇일까요

제가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에 관해, 글을 통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거죠. 활자가 주는 해방감을 맛보고 나니 내게 새로운 세상을 준 건 글이니까 이제 그 어떤 것이든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기록한 게 바로 나라는 여성의 역사고, 모든 감정이 생생하게 들어가 있으니까요.


‘나는 과연 어떤 페미니스트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왔습니다. 의심이 들 땐 없었나요

전혀요. 서른 이후로 내가 페미니스트인 걸 의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내게 준 것이 너무도 많았으니까. 심지어 이 시대에 대한민국 여자로 태어난 건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서라고 느낄 정도로 확고했어요. 다만 어떤 페미니스트냐 하면 여자를 살리는 페미니즘을 하고 싶었어요. 가부장제 사회가 여자를 죽이고 비난하고 탓하고 해를 입히는데, 우리 엄마는 죄인도 아닌데 죄인처럼 스스로 생각한 것이 안타까워 그게 페미니즘으로 발현된 거고, 그때 제 무기는 글쓰기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자 유숙열의 욕망은 무엇인가요

지금의 욕망이라면 이 책이 다 팔리는 겁니다(웃음). 그리고 칠순이 넘었으니 죽음을 생각해야 될 나이지만, 그런 생각 안 하고 사는 거예요.


재킷과 팬츠는 모두 Cos. 셔츠는 Auralee. 타이와 아이웨어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재킷과 팬츠는 모두 Cos. 셔츠는 Auralee. 타이와 아이웨어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그나저나 표지 속 사진은 언제 찍힌 건가요

저마저도 뉴욕 리포트의 일환이 되길 바라서 고른 사진이에요. <리터닝 우먼스> 뉴스레터에 실린 사진이었는데, 아마도 ‘시스터 파이어’ 페스티벌 때였을 거예요. 이틀간 메릴랜드 타코마 파크에서 헌터 칼리지 페미니스트들과 함께 참여해 노래와 시도 부르고, 페미니스트 굿즈도 사고팔고…. 완전한 페미니스트 축제를 한 날이었습니다.


<뉴욕 페미니즘 리포트>라는 책 제목은 어쩌면 딱딱하지만, 사진 속 표정은 너무 행복하게 즐기고 있는 것 같아요. 이때 행복했나요

행복했지요, 진짜.


그때 청년 여성 유숙열에게 한마디하신다면

숙열아, 너 잘하고 있어! 참으로 열심히 살았어요. 뉴욕에서 함께 찍힌 이 친구들과 모두 ‘우리’의 기록으로 남았네요. <엘르> 독자들도 페미니즘에 대해 더 친숙하게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거리 두는 사람도 많고 어렵게만 생각하는데, 그저 자기 삶의 행복을 위한 거라고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유숙열

1980년대 중반부터 페미니스트로 살고 있다. 합동통신 기자로 재직 중 1980년에 해직된 뒤, 1982년 결혼해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1984~1990년 미주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일하며 뉴욕시립대 대학원에서 여성학 석사학위 취득. 1991~2004년 문화일보 국제부 차장, 생활건강부 부장, 여성전문위원. 1997년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를 창간했다. 2003~2006년 2기 방송위원회 위원. 현 이프북스 대표.

Credit

  • 에디터 전혜진
  • 사진가 김수진
  • 스타일리스트 이진혁
  • 헤어&메이크업 아티스트 서채원
  • 아트 디자이너 김민정
  • 디지털 디자이너 김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