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여성의 목소리와 언어를 일깨우는 아티스트, 라이아 아르케로스 클라라문트

스페인 예술가 라이아 아르케로스 클라라문트의 작업이 보내는 메시지는 일관되고 강력하다.

프로필 by 길보경 2026.01.23
혀 모양의 오브제이자 악기인 ‘자궁의 휘파람(Silbas Uterinas)’을 들고 있는 라이아 아르케로스 클라라문트. 여성의 목소리를 지워온 역사에 대한 은유적 저항이 스며 있다.

혀 모양의 오브제이자 악기인 ‘자궁의 휘파람(Silbas Uterinas)’을 들고 있는 라이아 아르케로스 클라라문트. 여성의 목소리를 지워온 역사에 대한 은유적 저항이 스며 있다.


페미니즘적 인식론에 기반해 신화적 서사를 창조하고, 여성의 신체에 새로운 상징을 부여하기. 스페인 예술가 라이아 아르케로스 클라라문트(Laia Arqueros Claramunt)의 작업이 보내는 메시지는 일관되고 강력하다. 드로잉과 판화에서 출발해 세라믹, 사운드,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로 확장한 그의 작업은 역사 속에 가려진 존재들의 목소리와 언어를 일깨우고 있다.


‘El Útero Espasmado’.

‘El Útero Espasmado’.


‘Tesmoforias’. ‘Máscara de la Comunión’. ‘Vitex Linguae-Impudicitia’. ‘Hydra’.

‘Corifeas Xilofón’.

‘Corifeas Xilofón’.


당신의 작업엔 언제나 ‘이야기’가 흐르는 것 같다. 이런 감각은 어디에서 온 걸까

나는 스페인 남부의 조용하고 햇살 가득한 해안 도시, 알메리아에서 자랐다. 자연 가까이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내게 관찰과 상상의 기초가 됐다. 교사였던 부모님은 내게 어린 시절부터 예술적인 관심을 놓치지 말고 문화를 존중하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연극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제인 구달, 도리스 레싱을 존경하는 생물학자 어머니 사이에서 세상을 관찰하고, 상상하며, 이야기의 세계로 들어가는 방법을 배웠다.


여성의 몸과 신화적 서사가 주축을 이루는 작업이다. 이런 주제에 천착하는 이유는
역사는 오랫동안 여성의 목소리를 침묵시켜 왔다. 나는 여성의 이야기와 신체, 신화 속 원형을 다루면서 나 자신의 경험에 질문을 던지고, 이야기를 만들며, 다른 이들 역시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내게 신화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동시대를 주변부의 시선으로 사유하기 위해 살아 있는 도구다.


신화에 개입해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내는 행위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

나 자신의 맥락과 페미니즘적 인식론에 기반해 신화를 다시 해석함으로써, 여전히 우리를 형성하고 관통하는 서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 속에는 혼종적 신체, 괴물, 침묵당한 목소리들이 존재한다. 결국 내 작업은 불복종과 저항의 몸짓에서 탄생한 새로운 이야기다.


잊혀진 여성의 목소리를 복원하고, 다시 상상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인물이 있을까

‘바우보(Baubo)’라는 인물과 깊은 연결감을 느낀다. 아나톨리아 기원의 <그리스 신화> 속 인물로 자신의 몸과 웃음을 드러내며 금기를 깨뜨린다. 신화 속에서는 외설적인 몸짓으로 축소돼 있지만, 그 안에는 유머와 지혜 그리고 해방의 힘이 담겨 있다. 내게 바우보는 ‘허락을 구하지 않고 존재하는 방식’을 상징한다. 웃음을 통해 권력에 맞서고, 경계를 넘으며, 금기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게 만드는 존재다.


자주 등장하는 ‘지노피아(Gynopia)’ 개념 역시 그런 연장선에 있는 것 같다

‘지노피아’란 여성 혹은 여성성과 관련된 모든 존재를 ‘보지 못하는 상태’를 뜻한다. 즉, 여성의 존재와 경험, 감각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 사회적· 문화적 실명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작업의 핵심은 근원적인 서사와 가치 체계를 질문하며 상징과 서사를 새롭게 쓰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드러내고, 침묵을 소리로 바꾸는 예술적 시도인 셈이다.


‘Filomena, la Contralto’.

‘Filomena, la Contralto’.


‘Baubo de Pfannenstiel’.

‘Baubo de Pfannenstiel’.


‘La Hystera errante. Monotype’.

‘La Hystera errante. Monotype’.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라이아 아르케로스 클라라문트.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라이아 아르케로스 클라라문트.


지난 ‘밀란 디자인 위크 2025’ 때 로에베 전시에서 ‘자궁’이라는 주제를 다룬 적 있다. 일상 오브제인 티포트에 어떤 의미를 담고 싶었나

티포트를 만들어달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그것을 단순한 오브제가 아닌, 내 개인적 상징 체계와 지노피아 연구를 엮어낼 기회로 봤다. 출발점은 단순했다. ‘내가 스스로를 위해 마시는 차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했다. 자궁 적출술 이후 자궁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허브 식물인 바이텍스를 자주 달여 마셨다. 그런 시간을 통해 티포트를 치유 도구이자 여성의 지식, 마녀적 전통의 상징으로 상상할 수 있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이텍스의 언어-금기를 깨는 몸짓(Vitex Linguae-Impudicitia)’다. 어떤 상징성을 지녔나

‘혀(Linguae)’는 여성의 목소리와 언어를 되찾는 행위를, ‘부끄러움도 없는(Impudicitia)’은 억압적인 체계에 대한 저항의 몸짓을 의미한다. 나는 이 티포트를 풍요와 여성성을 기리는 고대 그리스의 제전, 즉 테스모포리아(Tesmophoria)를 자유롭게 재해석한 ‘의례적 오브제’로 보고 있다. 개인적 상징과 집단적 기억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티포트는 단순한 생활 도구를 넘어 하나의 제의적 오브제로 확장된다.


전환점이 된 작품을 꼽는다면 ‘경련하는 자궁(El U′tero Espasmado)’. 이 작품은 하나의 봉헌물처럼 기능하는 사운드 조각으로, 확장된 신체처럼 존재한다. 이와 연결된 퍼포먼스 ‘외자궁을 매개로 한 소리 낭독(Lectura Sonorizada Con Exou′tero)’에서는 의학적 기록과 개인적 텍스트를 진동과 소리로 엮었다. 자궁 적출 이후의 애도와 깨달음의 과정을 목소리로 서사화한 작업이다. 이 두 작품은 내 예술 세계의 여러 층위를 응축하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집단적 공명을 보여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이 먼 미래에 신화로 남는다면, 어떤 이야기로 기억되길 바라나

솔직히 지금 시대에서 유산이나 신화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팔레스타인에서의 학살, 극우의 부상, 가부장제적 폭력, 인종차별, 심화되는 불평등 그리고 환경 파괴까지. 인류가 믿어온 가치가 무너지는 시대다. 그럼에도 남아야 할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여전히 다정함과 저항의 공간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기억일 것이다. 친구 마르타 니에토 포스티고의 시집 제목처럼 그런 장소들을 ‘다정한 장소(Gentle Place)’로 부르고 싶다. 서로를 인식하고, 나누며,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 말이다.


최근 집중하고 있는 프로젝트나 앞으로 준비 중인 전시가 있다면 지난 몇 년간 ‘바우보 나를 구원하소서(Baubo Me Salve)’와 ‘지노피아와 경련(La Gynopia y El Espasmo)’ 시리즈를 무대적·극적·사운드적 차원에서 확장해 나가고 있다. 향후에는 실험 퍼포먼스를 좀 더 집단 프로젝트로 발전시키고 싶다. 지금껏 구축해 온 세계관을 한데 엮은 책을 만드는 게 목표다. 일종의 ‘허구적 고고학서’처럼 우주적 서사와 신화들이 그 안에서 서로 얽히게 될 것이다. 내년 봄, 서울에서 새로운 프로젝트 전시를 준비 중이다. 갤러리 치키타 룸(Chiquita Room)과 한국의 큐레이터 오유정이 참여해 협업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당신의 예술세계를 세 단어로 표현한다면

의식, 지노피아, 진동. 내 작업은 변화를 일으키는 의식이고, 새롭게 보는 가능성이며, 모든 존재가 서로의 주파수로 공명하는 진동이라고 생각한다.

Credit

  • 에디터 길보경
  • 아트 디자이너 이유미
  • 디지털 디자이너 김려은
  • ©LOEWE
  • IGNACIO BARRIOS
  • COURTESY OF LAIA ARQUEROS CLARAMU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