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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빌리온 서울’이라는 사건, 지혜진
9월 1일부터 6일까지 서울 용산의 KCS에서 성황리에 열린 ‘파빌리온 서울’. 한국과 아시아 지역의 젊은 갤러리와 비영리 공간이 손을 잡았다.
엿새간 열린 페어의 마지막 날, 모든 일정을 마무리한 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We made it, and more to come!” 가장 먼저 떠오른 문장이다. 나로서는 처음 맡아 보는 규모의 프로젝트라 부담이 컸고, 오프닝 당일까지 얼마나 많은 관람자가 찾아올지 몰라 긴장고 는데, 첫날에만 1000명 가까운 관람자가 다녀갔다.
아쉬웠던 점과 ‘이건 해냈다’ 싶은 걸 하나씩 꼽는다면
준비 기간이 짧다 보니 더 많은 갤러리를 초대하지 못한 점,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구성하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지만 다음 에디션에서 확장할 여지가 그만큼 많이 남았다고 생각한다.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느낀 부분은 서울에서도 대안적이고 독립적인 방식의 아트 페어가 가능하다는 걸 실제로 보여줬다는 점이다. 컬렉터뿐 아니라 서울을 찾은 해외 미술관 관계자와 갤러리스트, 국내 큐레이터와 작가 등 미술계의 다양한 사람들이 한 공간에 섞여 있었다. “내년에는 더 많은 갤러리를 보고 싶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서울에도 이런 대안 아트 페어나 위성 페어에 대한 갈증과 호기심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느꼈다.
홍콩과 타이페이에서 열렸던 파빌리온이 어떻게 서울까지 오게 됐는지 궁금한 이들이 많다. 서울 에디션의 파트너로 합류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개인적인 계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미술계에서 일하면서 한국에 제대로 된 위성 페어가 많지 않다는 걸 늘 아쉽게 생각했다. 그러던 중 갤러리 ‘상히읗’ 이름으로 파빌리온 홍콩에 참여했고, 그곳에서 윌럼과 자연스럽게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PHD 그룹은 내가 좋아하는 갤러리 중 하나이기도 하고. 이후 윌럼이 서울에서 파빌리온을 열어보고 싶다고 제안하면서 나와 김영은 디렉터가 의기투합했다. 이런 전개가 아시아라는 지리적 환경과도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서울, 홍콩, 타이베이처럼 가까우면서도 서로 다른 미술 생태계를 가진 도시들이 하나의 플랫폼으로 연결될 수 있으니까.
서울 관람자는 파빌리온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현장에서 기존 아트 페어에서는 보기 어려운 장면을 발견한 순간도 있었는지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한 건 관람자들이 페어를 빠르게 ‘보고 나가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머무는’ 것이었다. 공간 곳곳에 직접 만든 의자와 벤치를 뒀고, 매일 퍼포먼스와 토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실제로 영상 작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거나,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퍼포먼스까지 보고 가는 사람이 많았다. 갤러리스트와 작가, 관람자가 자연스럽게 섞여 대화하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다. 특히 퍼포먼스 프로그램에 생각보다 많은 관심이 쏟아진 것이 기억에 남는다. 퍼포먼스를 보려고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고, 페어를 보러 왔다가 시간을 기다려 보고 가는 사람도 많았다.
파빌리온은 부스가 없는 페어이기도 하다. 부스를 없애면서 가장 달라진 것은
부스가 없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것을 바꾼다. 갤러리 사이의 물리적 경계가 사라지고, 그와 함께 심리적 경계도 느슨해진다. 나 역시 작품을 판매하는 것만큼이나 다른 갤러리스트를 만나고 새로운 협업 가능성을 찾기 위해 아트 페어에 참여한다. 각자의 부스 안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대신 같은 공간을 공유하다 보니 서로의 작가와 작품에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파빌리온 역시 판매 장소인 동시에 새로운 작가와 갤러리를 발견하는 장이다. 관람자 입장에서도 작품이 어느 갤러리의 것인지 명확히 구획돼 있지 않아 갤러리 이름보다 작품 자체를 먼저 발견하는 경우도 많았다. 작품에 먼저 관심을 가진 뒤 “이 작품은 어느 갤러리에서 나온 건가요?”라고 묻기도 했다. 물론 부스가 없는 만큼 전체 작품과 공간 큐레이션을 주최 측이 맡아야 해서 조율 과정이 복잡했다. 결과적으로 하나의 공동 전시처럼 유기적인 풍경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관람자나 미술계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여기서 작품을 판매하나요?”라고 묻는 관람자가 종종 있었다. 공간이 전시에 가깝게 보였기 때문이다. 분명 작품을 판매하는 아트 페어지만, 작품을 거래하기 위한 구조로 공간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이 부분은 앞으로 더 고민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지금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자연스럽게 판매까지 연결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작품을 구매하는 방식에서도 기존 아트 페어와 다른 반응이 있었나? 실제 판매가 이뤄지는 순간에 파빌리온이 이야기하는 ‘느린 성장(Slow Growth)’과 ‘Art First’라는 철학이 어떻게 작동했는지
일반 아트 페어에서 느껴지는 경쟁적인 구매 분위기, 갤러리들이 적극적으로 관람자를 붙잡아 판매로 연결하려는 분위기는 확실히 덜했다. 오히려 첫날 오프닝을 편하게 즐기고 돌아갔다가 다음 날 다시 찾아와 작품을 구매한 사람도 있었다. 작품을 보자마자 구매 여부를 결정하기보다 일단 충분히 보고, 공간에 머물고, 작가나 갤러리스트와 이야기를 나눈 뒤,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나는 판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갤러리에게 판매는 작가와 지속적으로 일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니까. 그런 점에서 ‘Art First’는 판매를 부정하는 개념이 아니다. 거래 이전에 작품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먼저 만들어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서울 기반 갤러리 ‘상히읗’의 디렉터 지혜진. 파빌리온 홍콩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파빌리온 서울’의 파트너로 합류해 첫 에디션을 함께 만들었다.
‘파빌리온 서울’을 통해 일어난 한국과 해외 미술계 사이의 교류도 궁금하다. 독립 공간과 젊은 갤러리들을 모아 페어를 열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게 있다면
한국과 해외 갤러리스트 사이에 생각보다 활발한 교류가 이뤄졌다. 나 역시 ‘상히읗’으로 참여했는데, 파빌리온 서울에서 만난 해외 갤러리스트들과 내년 협업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 독립 공간과 젊은 갤러리 사이의 경계가 생각보다 선명하지 않다는 걸 느꼈다. 운영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좋은 작가를 발굴하고, 그들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그 활동을 어떻게 지속될 것인가라는 고민을 하고 있더라. 독립 공간뿐 아니라 신생 갤러리 역시 지속 가능성이나 재정적 측면에서 많은 한계를 안고 있는 것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상업과 비상업이라는 구분으로 각각의 역할을 설명하기에는 지금의 젊은 미술 공간이 훨씬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다.
올해 1월에 열린 타이페이에서 첫 에디션을 연 파빌리온. 약 15개 갤러리가 참여했다.
첫 에디션을 마친 지금, 파빌리온 서울이 무엇으로 남길 바라나
하나의 완성된 답보다 일종의 도화선이 됐으면 좋겠다. ‘프리즈 서울’을 위해 전 세계 미술 관계자가 모이는 시기에 한국의 갤러리스트와 큐레이터, 작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새로운 페어와 전시, 프로젝트를 만들어낸다면 서울의 미술 생태계가 훨씬 풍성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타이페이에 이어 지난 3월 열린 파빌리온 홍콩.
문화는 원래 천천히 움직인다, 윌럼 몰스워스
파빌리온은 스스로 ‘얼터너티브 아트 페어’라고 소개한다. 여기서 ‘얼터너티브’는 무엇의 대안인가
파빌리온은 갤러리와 작가, 컬렉터, 큐레이터, 미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기존 아트 페어 경험의 대안이다. 판매할 작품을 가진 갤러리들이 모이는 자리라는 한 가지를 빼면 거의 모든 것이 다르다. 흔히 아트 페어 하면 떠올리는 요소들의 대부분을 상상할 수 있다.
올해 파빌리온은 타이베이와 홍콩, 서울에서 열렸다. 도시를 옮겨갈 때 변하지 않는 것은
철학이다. 각 신(Scene)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에 정직하고 창의적으로 응답한다는 것. 또 다른 것은 공간을 조성할 때 논-익스트랙티브 건축으로 푼다는 점이다.
홍콩 갤러리 PHD 그룹을 운영하는 윌럼 몰스워스와 이사벨 청 부부. 2025년 여름, 파빌리온을 설립했다.
여러 도시를 오가겠다는 결정은 도시들 사이의 관계를 쌓는 일인가
그렇게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우리는 각 도시에서 매년 페어를 반복할 계획이고, 비전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큰 규모의 변화를 만들고 싶다. 어떤 면에서는 규모를 키우겠지만, 150곳이 넘는 갤러리가 참여하는 아트 페어는 아닐 것 같다.
‘파빌리온 서울’은 어떻게 시작됐나
15년간 미술계에서 일해온 경험과 일이 돌아가는 방식을 바꾸고 싶다는 욕구가 쌓여 만들어진 결과다. 얼터너티브 아트 페어는 수십 년 전부터 열려왔지만, 여러 미술 신의 필요에 응답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혹은 국제적으로 진행된 경우는 드물었다. 나는 파빌리온을 미술 신의 새로운 방식을 길러내는 일종의 제스처라고 생각한다. 서울의 신은 대단하다. 내가 그곳에 가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서울에 파빌리온 같은 페어가 필요하다고 느끼나
서울에 파빌리온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주제넘은 일이다. 아니, 어쩌면 필요하지 않다(웃음)! 다만 서울이 파빌리온 같은 걸 원한다는 생각은 한다. 일반 아트 페어에서 자리 잡기 어려운 얼터너티브한 작업, 신진 작업을 지원할 기회를 만들 수 있으니. 갤러리들이 한 시간, 한 장소에 모이면 엄청난 에너지가 생겨나는데, 파빌리온은 그런 에너지를 지원한다. 컬렉팅과 동시대 미술이 무엇인지, 그 뿌리에 닿게 해준다.
‘파빌리온 서울’을 열며, 한국 미술 신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서울은 어쩐지 홍콩을 떠올리게 한다. 갤러리 신이 대단히 협력적이고, 서로를 지지하며, 우호적이다. 모든 층위에서 갤러리들이 서로 도움을 주고 힘을 북돋워주더라. 또한 서울의 퍼포먼스 작가들에게 자신의 작업을 선보일 무대가 필요하다는 것, 그들을 기다려온 열렬한 관람층이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늘 퍼포먼스 아트의 힘과 중요성을 믿어왔기에 반가웠다.
‘파빌리온 서울’에는 상업 갤러리뿐 아니라 ‘YPC Space’ 같은 비영리공간도 함께한다. 두 진영을 같은 자리에 놓은 이유는
그 지점은 ‘파빌리온 서울’만의 특징이었다. 타이베이와 홍콩에서는 시도하지 않았다. 앞선 두 에디션을 거치며 비영리공간이 우리가 관계 맺고 있는 생태계의 중요한 일부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는데, 상업 갤러리 역시 초반의 여러 해는 ‘비영리’로 운영됐다. 파빌리온에서 이 주제로 토크도 열었다. 우리가 각자의 방식으로 미술 신에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지 짚어봤다.
파빌리온에서도 작품이 판매된다. ‘빠른 판매’와 ‘지속 가능한 컬렉팅’의 차이는
파빌리온은 상업주의의 대안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시장이 작가에게 힘을 실어주고 그들을 지원하는 힘을 굳게 믿는 타입이다. 파빌리온에서 컬렉팅하는 것이 전통 페어와 다른 점은 훨씬 더 깊이 관여하고, 더 여유롭고, 더 진솔하다는 것이다.
그런 분위기를 위해 어떤 장치를 마련했나
모든 에디션에서 실행한 단순한 방법 중 하나는 좌석을 넉넉하게 두는 것이다. 앉을 자리가 있으면 긴 대화가 자연스럽게, 즉흥적으로 이뤄진다. 그런 것이 열정과 장기적 애착을 만들어낸다.
파빌리온은 ‘느린 성장’을 강조해 왔는데, 이것은 건강한 시장과 긴 커리어에 관한 이야기인가
거품이 생기면 컬렉터와 작가 모두 상처받고 떠난다. 전자는 무언가에 너무 많은 돈을 썼고, 후자는 이후의 작업을 이어가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는다. 속도를 늦추면 작가와 컬렉터는 진지하게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리 비싸지 않거나 유행에 휩쓸리지 않은 작업에 위험을 감수할 수 있고, 결국 그런 작업이 중요한 작품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문화는 원래 느리게 움직이고, 세상이 따라잡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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