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신사의 기원

중세에 로맨스의 규칙들을 발명했듯 ‘신사’는 근대 영국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던 단어였다. 한 세기 전 최초의 신사들이 추구하던 젠틀맨십, 그 흥망성쇠의 연대기.

프로필 by ELLE 2010.12.15

모두가 알고 있으나 아무도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말들이 있다. 대체로 추상명사들이 그렇고, 때로는 지나치게 범용되는 보통명사들도 포함된다. ‘신사’ 역시 그렇다. 누군가는 그 단어에서 조촐한 수트에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그리트식 초상을 떠올릴 테고, 어떤 이는 ‘신사 숙녀 여러분’으로 이어지는 빈말의 향연을 생각할 수도 있다. 최고급 테일러드 수트나 낡은 박쥐 우산, 아버지의 앨범에서 찾아낸 퇴색한 사진 혹은 조지 클루니의 어떤 포즈. 이제 신사의 뉘앙스는 이 모든 것을 포괄하면서 그중 어떤 것에도 뚜렷하게 정착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래전, 계층의 범위가 협소하고 취향의 전파력이 지금보다 약한 시대에 그 뜻은 지금보다 훨씬 촘촘하고 명료했다. 예컨대 이런 구절들. “엇갈린 형태로 걸려 있는 암청색의 노와 버찌 빛 노는 그가 옥소니언과 리앤더 조정클럽 출신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고 펜싱용 칼과 복싱 글러브는 양쪽 모두의 경기에서 우승한 인물의 것이었다. 벽은 온통 대형 동물의 머리 박제로 장식되어 있다시피 했다. 거만하게 입술을 아래로 늘어뜨린 엔클레이브산의 희귀한 흰코뿔소를 포함한 이것들은 전 세계에서 직접 사냥해온 최고의 표본이었다…. 지금 시가를 피우며 나를 찬찬히 뜯어보고 있는 사내야말로 바로 그 유명한 록스턴 경이었다.”
코난 도일의 <잃어버린 세계>는 신사의 조건들이 가장 정교했던 빅토리아 시대가 배경이다. 탐험가이자 ‘젠틀맨’인 록스턴 경에 대한 묘사에서 알 수 있듯, 당시의 신사는 완벽한 인간상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19세기의 어느 시점까지만 해도, 송아지가죽 장갑과 포켓 속의 회중시계, 클래식한 수트는 젠틀맨의 품격 중 일부분을 차지할 뿐이었다. 빅토리아 시대는 세상의 절반을 영국이 차지한 시절이었다.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취향, 최고의 교육뿐 아니라 스포츠에 대한 재능과 마초적인 모험심 또한 사회에서 요구하는 상류층의 자질이었다. 거기에는 윤리적인 소양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19세기 영국의 도덕에는 자문화 중심주의와 제국주의의 합리화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 사회의 기본적인 교양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저술가이자 사회개량가였던 스마일스에 따르면, 부와 지위 이외에도 신사가 갖춰야 할 덕목은 단지 늘어놓는 것만으로 숨이 찰 정도다. “정직하고 신실하고 올바르고 겸손하고 온화하고 용기 있고 스스로를 존중하고 스스로 돕는” 사람이 그가 제시하는 신사상인데, 동시대의 비평가 존 러스킨이 내린 정의도 거기에 못지않다. “탁월한 상상력과 순수한 유전자를 바탕으로 훌륭한 교육을 받고 동정심 역시 갖춰야 한다. 무엇보다 다른 계층들의 수고 덕분에 살아가는 자신의 책무를 아는 것이 젠틀맨의 정수다.” 그런데 그토록 영광스럽고 고된 신사의 존재감이 어쩌다 박제된 유령처럼 실체 없는 무엇으로 변해버렸을까? 신사의 흥망성쇠는 영국에서 시작됐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서 젠틀맨십(gentlemenship)이 본격적으로 개화한 탓도 있지만, 젠틀맨의 어원과 속성 역시 영국 특유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었다. 그 첫 번째 단초는 16세기 계급 용어의 단층 속에서 화석처럼 발견된다.
젠틀맨은 원래 영국 사회의 한 계급에 속하는 구성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젠틀맨의 복수형인 ‘젠트리(gentry)’는 런던의 사교층에게 인정받지 못한 하급 귀족들을 가리켰다. 지방에 살던 그들은 큰 부를 쌓지는 못했지만 사회적인 존경을 받았다. 그 한가하고 따분한 명명이 역동적인 대도시로 거처를 옮긴 것은 시민계급이 부상한 후였다. 하위 귀족뿐 아니라 중상류층도 의회의 일원에 포함됐고, 사람들은 변호사, 의사, 장교 등 소수의 전문직들과 일하지 않아도 먹고살 만한 상인들까지 젠틀맨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신분 체계가 모호해지면서, 신사와 신사 아닌 자의 경계는 제도적이라기보다 문화적인 의미로 옮겨갔다. 원래 영국은 유럽 본토에 비해 촌스럽고 투박한 나라였다. 버킹엄 궁전의 사교계를 조금만 벗어나면, ‘젠틀’한 영국인이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영국의 국민성에는 언제나 사치와 방종을 혐오하는 게르만 특유의 결벽증이 흐르고 있었다. 모범적인 행동 양식을 계속 개발하고자 하는 그 천성에 시민계급의 신분 상승 욕구가 덧붙여지자 놀라운 화학작용이 일어났다.
프랑스와 독일의 어떤 인간형과도 다른 영국적 교양인이 제시됐고, 이튼(Eaton)과 해로(Harrow), 럭비(Rugby) 등의 상급 교육기관들은 그 규범을 엄격하게 전수했다. 당시의 교과서와 지침서에서 말하는 신사는 여러 가지 태도를 조화롭게 갖춘 복합적 성격의 소유자인데, 무엇보다도 겸양이 최고의 미덕이었다. 잘난 척하며 허세를 부리거나 뻑뻑하게 구는 태도는 금물이다. 이는 결코 굴욕적인 겸손이 아니라, 자기 확신에서 생겨난 자제력의 표현이었다. 그래서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는 항상 실제보다 축소해서 말해야 했다. 인도의 정글이나 담배 연기가 매캐한 방에서 디너를 먹더라도 식은땀을 흘려서는 안 되며, 톱니바퀴 돌아가는 굉음이 귓전에 파고든다 해도 눈썹 하나 까딱해서는 안 되었다. 식사가 끝난 후 아라비아의 로렌스처럼 낙타를 타고 사막을 달리거나 엽총을 차고 솔로몬의 동굴로 떠난다 해도, 그의 행동에는 흐트러짐이 없어야 했다.
모범적인 신사를 양산하는 공간으로서 이 시기의 학교는 근대적 교육 체계의 기반을 마련했다. 빅토리아 후기로 갈수록 신사를 규정하는 조건 중 하나에 공립 학교 졸업이 포함된 것도 당연했다. 근대적인 스포츠가 탄생한 것도 젠틀맨십의 영향이었다. 다양한 지역에서 모여든 학생들을 통합하고 투쟁심과 예의, 사교를 동시에 가르치기 위해 영국 각지의 야만적인 운동 경기들을 뭉뚱그려 다듬었고, 그로부터 축구(football)가 고안됐다. 조정 경기와 테니스 역시 처음으로 규칙이 성문화되면서 대표적인 신사의 스포츠로 등극했다. 학교를 졸업한 신사들은 당대 영국의 원동력으로 일했으며, 여가 시간에는 클럽에 모였다. 그들은 유행과 무관한 보수적인 옷차림으로 등장했지만, 그런 복장의 격식을 부드럽게 만드는 유머러스한 액세서리를 하나쯤은 달고 있었다. 지적인 토론부터 당구 게임까지 다양한 놀이가 벌어지던 클럽은 귀족들의 낡은 사교를 금세 대체했다. 영국의 기세가 전 세계에 뻗어감에 따라, ‘젠틀맨스 클럽’은 아프리카와 인도까지 진출했다.
신사의 스타일은 공고해졌으나, 그의 소양을 누가 어떤 식으로 판단할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대영제국의 전성기는 깊어갔고, 신사의 조건에는 ‘다른 사람들이 신사라고 인정하고 존경하는’의 조항이 추가됐다. 젠틀맨의 계급은 법적 신분이 아닌 사회적 인식의 문제로 확장된 것이다. 소유 장원의 크기, 하인의 숫자, 혈통 등도 고려 사항이었지만, 주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젠틀맨으로 받아들여주는가가 가장 큰 관건이었다. 전 세계에서 흘러온 물산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중상류층의 허영이 극으로 치닫던 참이었다. 남자들은 그 자격을 얻기 위해 신사의 양식을 복제하고 답습하기 시작했다. 최고급 커프스 링크와 구두가 즉각적인 판단 근거로 작용했고, 청교도적인 에티켓은 점차 수학 공식보다 복잡하게 발전해갔다. 형식으로부터 영혼이 실종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함께 스노브(snob)가 출현했다. ‘신사인 체하고 고상한 척 허세를 부리는 속물들’을 일컫는 그 단어는 소설가 윌리엄 새커리의 작품 <스노브 독본>에서 유래했다. 중류계급은 상류계급을 흉내 내며 거들먹거렸고, 상류계급은 딱딱한 허식 뒤에서 문란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이어갔다. 매너리즘은 곪아가게 마련이다. 제국주의가 물러가고 표면적인 사회계급이 완전히 해체됨에 따라, 신사의 시대도 막을 내렸다. 특정한 행동 규범들은 여전히 유효했지만, 약간의 지식과 돈만 있으면 누구나 신사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경제적으로 교환이 가능한 가치들은 욕망의 객체가 될지언정, 존경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도덕책의 목차처럼 여덟 개의 형용사가 나열되던 신사의 존재감은 시상식 단골 문구 정도의 흔한 관용어로 그 범위를 넓혔다.
이런 상황은 신사의 발원지인 영국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다. 국내에 주재하고 있는 영국인들에게 ‘젠틀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매너 좋고 침착한 사람을 좋게 이르거나 옷을 번듯하게 차려입은 사람에게 ‘이 신사분(this gentleman)’이라는 표현을 쓰는 정도가 전부, 이제 중절모를 쓴 신사의 풍모는 낡은 팝송 가사처럼 무력한 이미지로 남았다. 그러나 초창기의 신사들이 내세웠던 미덕들마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한 세기가 흐른 지금, 어떤 이름으로든 그 가치를 복원한다면 그 원형을 윌리엄 모리스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시인이자 사업가였던 그는 <유토피아>의 저자이자 빅토리아 양식의 벽지들을 디자인한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상류층 출신의 신사였지만 수작업을 즐겨 했고, 예술의 가치를 미적 성취뿐 아니라 노동의 즐거움에서도 찾았다. 아름다움을 독차지하기보다 사람들과 함께 누리고 싶어했으며, 독특한 스타일로 수많은 후대 아티스트들에게 영감을 줬으나 그 자신은 과거의 예술에서 답을 찾았다. 열린 마음으로 전통적인 가치를 사랑한 모리스는 고건물 보호운동과 환경운동을 벌이는 데도 삶의 일부를 투자했다. 모리스의 삶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일종으로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의 행동이 어떤 의무감이 아닌 자발적인 열정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은 분명한 차이점이다. 섬세한 형식은 분명 우아함의 조건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우아함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시대의 헤게모니가 변하고 스타일의 나선이 끝없이 반복된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런던을 누비던 수만 개의 실크 해트가 모두 사라진 후에도 기억되는 어떤 삶처럼, 시대를 초월하는 젠틀맨십의 표본이 거기에 있다.


*자세한 내용은 루엘 본지 12월호를 참조하세요!

Credit

  • 에디터 정미환
  • 포토 이기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