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하예진이 취향과 안목으로 꾸민 부암동 집
새 일, 새집 그리고 새로운 삶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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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닝 공간 한가운데, 한스 올센의 빈티지 테이블과 조명이 단정한 분위기 속에서 조용한 중심을 잡아준다.
집을 이사하고 새로 꾸리는 일은 삶의 순서를 다시 짜는 일과 비슷하다. 무엇부터 시작할지, 어떤 것을 남기고 비울지 스스로 묻게 된다. 비주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하예진에게도 삶의 리듬을 새롭게 정리해야 할 변화의 시간이 찾아왔다. 지난 2월, 10년 넘게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독립하던 무렵, 서대문에서 종로 부암동으로 이사하는 것 역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녀는 직업도, 공간도, 일상도 새롭게 설계했다.

독특한 구조를 지닌 주방. 공간을 따라 싱크대를 길게 확장하고, 그 끝에 팬트리를 마련해 기능과 동선을 모두 갖춘 주방을 완성했다.
“누구에게나 한 번은 살아보고 싶은 동네가 있잖아요. 저에겐 종로가 그런 곳이었어요.” 하예진은 막연한 동경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부암동에 정착했다. 남편 오주현의 갤러리 ‘wwnn’이 있는 팔판동과 가까워 익숙한 생활권이기도 했다. 오랜 세월의 정취가 깃든 주변과는 달리 건물 1층에 자리 잡은 하예진 · 오주현 부부의 집은 집주인의 신선한 취향과 감각적인 개성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검은 바닥과 하얀 벽이 대비를 이루는 깔끔한 공간에 개성 있는 가구와 오브제들이 은은한 활기를 더한다.

거실 한쪽에는 즐겨 듣는 LP들과 오디오 시스템이, 그 옆으로는 필립 스탁의 실버 선반 ‘맥 지(Mac Gee)’ 위에 감각적으로 큐레이션한 오브제들이 놓여 있다.
나란히 이어진 세 개의 방 중에서 햇살이 잘 드는 곳에는 서재가, 그 옆으로는 침실과 드레스 룸이 이어진다. 그리고 양끝에는 주방과 거실이 배치돼 있다. 22평 남짓한 이 공간은 친구이자 공간 설계 스튜디오 시노(Shinoh)가 담당했다. 좁고 비효율적이던 주방은 가장 많은 고민을 안겼다. 과감하게 아일랜드 식탁을 없애고, 사용하지 않는 뒤쪽 공간까지 싱크대와 연결하자 주방이 깊이 있는 지그재그 형태로 확장됐고, 독특한 구조적 매력이 배가됐다. 거실과 이어지는 오픈형 현관에는 벽을 세워 신발장을 마련하고 동선도 정돈했다. 탄탄히 짜인 구조 위에 하예진은 그녀만의 공식을 더했다. 첫째는 블랙, 화이트, 메탈, 우드의 네 가지 색과 소재로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취향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잖아요. 그래서 시간이 지나도 유행을 타지 않고, 다른 취향과 어울릴 수 있는 기본 재료와 색을 선택했어요.” 둘째는 비우기다. “미니멀 취향이지만 결국 미니멀한 물건을 많이 모으면 맥시멀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꼭 필요한 것만 남기려고 마음먹었어요.” 그렇게 남긴 몇 점의 가구는 비워낸 여백 안에서 오히려 더 강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대표적 예가 프랭크 게리의 ‘위글 체어(Wiggle Side Chair)’.

에이펙스 트윈(Aphex Twin)의 LP가 마치 하나의 오브제 같다.

서재는 몬스트럭쳐 수납장과 테크노루멘의 실링 램프 ‘DMB30’로 간결함과 실용미의 조화를 꾀했다.
“이전 집에서는 디자인의 본질이 잘 드러나지 않았는데, 이 공간에서는 골판지라는 저렴한 재료로 만든 조형미와 발상이 더욱 선명하게 돋보이더라고요. 저 역시 한정된 자원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콘텐츠 일을 하고 있어요. 이 의자가 가진 정신은 제 작업의 방향과도 닮아 있죠. 의자를 볼 때마다 괜히 더 애정이 가요.” 하예진이 고른 가구 하나하나에는 그녀의 안목과 고민이 녹아 있다. 거실에는 까시나의 ‘마라룽가’ 빈티지 소파와 논픽션홈의 스툴, 이케아 조명이 조화를 이루고, 벽 한쪽에는 필립 스탁이 디자인한 실버 컬러의 선반 ‘맥 지(Mac Gee)’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멕시코에서는 닭이 부와 건강을 상징한다고 한다. 남부 오악사카 지역의 장인이 만든 형형색색의 닭 오브제와 나무 십자가 조각이 정제된 공간에 이국적인 생기를 불어넣는다.
“전체적으로 블랙 위주의 공간이 무거워 보일 수 있어 고민하다가 우연히 이 선반을 발견했죠. 덕분에 공간의 균형을 잡아주고, 동시에 시각적 포인트가 생겼어요. 선반 구조도 정교하게 설계돼 못 없이도 벽에 안정적으로 고정할 수 있죠.” 침실에도 그녀의 고민과 사적 애호가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스테인리스스틸 키친 브랜드 ‘보비아(Vobia)’와 협업으로 제작한 평상형 메탈 프레임 침대는 구조로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침대 옆 빈티지 조명과 사이드 테이블을 나란히 배치해 절제된 단정함을 완성했다. 몬스트럭쳐 수납장과 네덜란드 가구 브랜드 하빈크(Harvink) 책상, 테크노루멘(Tecnolumen)의 실링 램프 ‘DMB30’로 간결함과 실용미가 조화를 이룬 서재는 만화책과 아트 서적, 유쾌한 오브제들이 공간의 표정을 만들어낸다. 남편이 추천해 주거나 지인에게 선물받은 아트 작품이 집 안 곳곳에 놓여 있고 스위치나 손잡이, 주방 용품 등 작고 섬세한 디테일들이 공간의 개성을 한층 끌어올린다. 이것이 가구가 많지 않은 미니멀한 공간이 전혀 단조롭지 않은 이유다.

빈티지 스위치에는 키치한 매력이 담겨 있다. 기독교 신자인 아내와 천주교 신자인 남편,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이 공유하는 작은 상징.

네덜란드 가구 브랜드 하빈크(Harvink)의 책상 아래 쌓여 있는 셰이커 박스는 자잘한 소지품을 정리하며 공간에 질서와 미감을 더해준다.
하예진은 이 집으로 이사 오면서 삶의 속도가 달라졌다. 매일 아침 반려견 국희와 산책하며 단골 카페에 들르고, 백사실계곡에서 거북이를 바라보고, 분주한 차량 사이를 유유히 걷는 여유로움이 생겼다. “이전 집은 그저 잠만 자는 곳이었어요. 빨리 어딘가로 나가고 싶었죠. 그런데 지금은 집에 머무는 시간이 좋아졌어요. 집이라는 개념 자체가 바뀌었죠.” 프리랜서가 된 후 하예진은 더 바빠졌지만 ‘즐거운 무리’를 하고 있다. 바쁨이 에너지가 되고, 그 에너지가 다시 이 집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로 이어지며 일과 쉼, 창작과 회복이 자연스럽게 흐른다. “휴식이란 뭘까? 개인의 삶이란 무엇일까? 요즘 이 집이 계속 저에게 물어요. 집에 들어설 때마다 ‘정신 차려. 너의 궁극적인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해’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웃음).” 공간을 통해 일과 마음의 속도를 조절하며 조금씩 더 건강한 삶을 그려나가는 그녀에게 이 집은 모든 변화의 시작이자 방향을 비추는 나침반 같은 존재다.
Credit
- 에디터 권아름
- 사진가 맹민화
- 아트 디자이너 이아람
- 디지털 디자이너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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