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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 더 무비', 아는 맛과 모르는 맛의 완벽한 조화

2시간 35분의 러닝타임을 순식간으로 만드는 영화적 쾌감.

프로필 by 라효진 2025.06.25

레이스를 앞두고 바짝 달궈진 서킷 뒤 좁은 방에서 한 남자가 잠을 자다가 일어납니다. 짝짝이 양말에 악세사리를 주렁주렁 매단 남자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몸을 풉니다. 아무렇게나 눌러 쓴 블루투스 헤드폰에서는 레드 제플린의 음악이 흘러 나오고요. 그대로 서킷으로 향한 남자는 자신을 보고 환히 미소 짓는 사람들에게 늘 그래왔다는 듯 능청스럽게 응대합니다. 결국 그가 도착한 건 질주를 앞둔 차의 운전석입니다. 여기서 남자가 어떤 인물인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버드나무처럼 유연하다가도 레이스에 관련한 일에는 '차라리 부러지겠다'며 대나무처럼 뻣뻣하게 버틸 것이고, 달리는 일 말고는 세상에 관심도 없겠죠. 제멋대로에 말투도 독한데 이상하게도 모두가 그를 좋아할 것 같습니다. 보아하니 적당히 녹록지 않은 인생을 살아 왔겠고, 상처도 있을 거예요. 그리고, 남자는 지금 이 레이스에서 우승할 게 분명합니다.



너무나도 전형적이어서 그만 결말까지 눈 앞에 펼쳐지는 영화 <F1 더 무비>의 인트로입니다. 비슷하게 시작하는 작품 중 당장 떠오르는 건 후지TV <엔진>의 첫 장면인데, 정확히 20년 전 드라마죠. 이를 전후로 숱한 'Badass' 류 남자 주인공을 내세운 이야기들이 유사한 작법으로 출발해 왔습니다. 다만 <엔진>의 칸자키 지로(기무라 타쿠야)는 30대 초반이었고 <F1 더 무비>의 소니 헤이스(브래드 피트)는 60대라는 점이 다릅니다. 만약 <F1 더 무비>의 시작에 흰눈부터 뜨게 된다면, 환갑이 넘은 브래드 피트가 '나 아직 안 죽었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듯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일 거예요. 최근 그가 화제의 중심에 선 사건이라곤 안면거상 성형설 정도의 가십이었으니까요.


인트로 이후도 서사의 흐름 측면에서 변명의 여지 없이 전형적입니다. 이 영화가 연출자인 조셉 코신스키 감독의 전작 <탑건: 매버릭>의 지상판에 가깝다는 말도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먼저 마음 가는 대로 살다 보니 동년배처럼 안정적인 삶을 꾸리지 못한 채 장년을 맞았지만, 실력 만은 조금도 녹슬지 않은 '베이비 부머' 베테랑이 등장하죠. 또 그런 선배보다 자신의 실력과 미래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 건방진 유망주 '젠Z'가 있습니다. 이 두 인물 사이에서촉발되는 갈등이 결국은 세대 화합으로 발전하는 과정이 주요 줄거리입니다. 두 영화가 각각 주인공의 조력자로 오랜 친구 아이스맨(발 킬머)과 루벤 세르반테스(하비에르 바르뎀)을 내세운 것도 유사해요.



이토록 뻔한데 <F1 더 무비>는 재밌습니다. 전형성이란 건 오랜 시간 몇 번이고 반복할 만큼의 매력 덕에 구축된 것이니까요. '아는 맛'이라고 좋아하는 음식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여기에 <F1 더 무비>는 '모르는 맛'을 조화롭게 가미합니다. 결코 짧지 않은 2시간 35분의 러닝타임이 순식간에 지나갈 만큼이요. 특히 모터 스포츠의 인기가 그리 높지 않은 한국에서 F1(포뮬러1)은 익숙지 않은 대회일텐데요. 그저 냅다 빨리 달려서 가장 먼저 돌아오면 되는 것이 카 레이스라고 생각했다면 <F1 더 무비>를 통해 모터 스포츠의 매력에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먼저 영화에서 다루는 F1은 보통 자체 제작한 레이스 카로 달리는데, 공기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차체를 만들기 위해 세계 최고의 기술자들이 모입니다. 더 강하고 내구성 있는 엔진과 접지력 높은 타이어도 필요해요. 따라서 모터 스포츠는 마치 로켓 산업처럼 굉장히 기술집약적이고 엄청난 자본이 투입되는 장르죠.



이렇게 만들어진 경주용 자동차는 서킷을 최대 시속 350km로 내달립니다. 극 중 소니 헤인스가 첫 등장과 함께 우승을 거머쥔 '데이토나 24'의 경우 그보다 조금 낮은 평균 시속 200km 초중반 선에서 진행되지만, 무려 24시간 동안 레이스가 이어지죠. 아무리 최첨단 기술로 제작된 레이스 카일지라도 설비 마모를 견딜 수 없어요. 그래서 달리던 차들도 경주 중 '피트(Pit)'라고 불리는 정비소에 멈춰요. 여기서도 시간 싸움이 벌어집니다. F1에선 타이어를 갈아 끼우는 정도의 '피트 스톱'은 대개 2초 미만으로 잡습니다. <F1 더 무비>에서는 이 경이로운 광경의 모든 순간을 클로즈업해 스크린에 붙잡아 둡니다. 극장에서, 특히 아이맥스 등의 특별관에서 보면 그 긴장감을 더욱 체감할 수 있어요.


더불어 서킷 위에선 천상천하유아독존이던 소니가 팀의 젊은 선수 조슈아 피어스(댐슨 이드리스)의 조력자로 모두의 승리를 이끌게 되는 부분도 흥미로워요. 팀에 단 두 명 뿐인 선수가 서로 잘났다고 다투다가 경기를 더블 리타이어로 마치는 최악의 상황까지 이르자, '나'를 굽히고 '우리'에 집중하는 건 조금 더 어른인 소니 쪽이었습니다. 결승선에서 가장 빛나는 것이 자신이 아닐지언정, 그는 F1 룰을 위반 직전까지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조슈아의 순위 향상을 돕습니다. 소니보다 더 빠르게 달릴 순 있지만 경주를 지배하는 건 오로지 그의 경험이었죠.



소니에게 아들뻘인 조슈아와 한 팀을 이루고 같은 목표를 갖는다는 건 일생일대의 타협이었습니다. 과거 소니는 F1 우상들과 함께 달렸던 유망주였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상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재능은 분명 출중했지만 '우상의 반열에 오를 정도'까진 아니었을 지도 모릅니다. 어떤 분야의 전설적 존재가 된다는 건 '잘하는 것' 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기도 하고요. 계기는 부상이었으나, 소니가 모터 스포츠의 정점인 F1을 떠나 수십 년을 방랑한 건 모종의 회피에 가까웠을 거예요. 크게 넘어진 후에는 금세 일어나더라도 또 넘어질까 봐 두려워지기 마련이니까요. 아무리 걸어봐도 정점에 올라설 수 없는 자신을 시인하는 건 더욱 어렵습니다. 특히 정점에 닿을 뻔했던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죠. 그래서 소니는 언제나 미련과 함께 낡은 밴에 올라 탑니다.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지만, 조슈아와 달리며 소니는 다시 '최고'와 가까워지는 방법을 찾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영광에 앞선 팀의 승리임을 인정하는 거죠. 똑바로 스스로의 한계를 마주한다는 건 후련하면서도 섭섭한 감정일 테지만요. 소니와 조슈아의 합이 맞아가며 팀의 순위는 올라갑니다. 그렇다고 늘 레이스가 순탄할 리는 없죠. 꼴찌 탈출을 하고 나서도 몇 번을 고꾸라진 소니의 머리 속엔 오래 묵은 물음 하나가 다시 떠오릅니다. 운전석에서 수없이 되뇌였을 "우리가 이걸 왜 하고 있지?"라는 물음 말이에요. 그리고 소니는 비로소 답을 도출합니다. 본질은 즐거움입니다. 명성에 집착하던 조슈아도, 꼴찌 팀을 팔고 싶지 않던 루벤도, 더 빠른 차를 만들고 싶던 케리(케이트 매케나)도 결국은 즐거움을 원동력으로 움직입니다. 내가 주인공이 되겠다는 집착을 버리고 그 본질을 마주하기 시작한 소니의 변화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죠.


만화 <슬램덩크> 속 능남고 주장 변덕규는 지역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숙명의 라이벌 상북고와 맞붙습니다. 능남도 상북도 이 경기에서 지면 전국 대회에 나갈 수 없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신장 207cm의 타고난 피지컬로 늘 주목 받았지만 상북의 주장 채치수와 늘 비교당하죠. 선수로서는 강팀의 주장이라는 자존심에 앞서, 내내 경기의 중심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최고의 선수가 되고 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변덕규는 상북과의 접전 말미 "나는 팀의 주역이 아니어도 좋다"라고 읊조립니다. 개인의 한계점이라는 막다른 골목을 뛰어 넘기 위해 그가 선택한 길입니다. 소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한 걸음 더 '진짜 어른'에 가까워진 소니는 바라던 '최고의 레이서' 타이틀을 끝내 쟁취할 수 있을까요? <F1 더 무비>는 25일 개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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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터 라효진
  •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