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임영주와 전설의 고향
K오컬트가 세계적 관심을 받는 지금, 임영주는 가장 흥미로운 이름이다. 2025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전시, ‘2025 프리즈 서울 아티스트 어워드’의 주인공도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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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주(b.1982)의 방은 사방이 수수께끼 같은 낙서로 가득하다. 칠판을 대신해 투명 비닐을 붙인 벽에는 알 수 없는 단어들과 그림, 숫자가 적혀 있다. “제가 머릿속이 복잡한 편인데, 그걸 또 너무 정리해 놓으면 안 돼서 이렇게 복잡하게 해두고 다시 봤다가 썼다가 지웠다 합니다.” 이 낙서는 지금 코앞으로 다가온 전시를 위한 밑그림과 자료들이다. 8월 28일부터 내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이하 ‘국현’)에서 열리는 ‘올해의 작가상 2025’ 최종 4인으로 선정된 그는 9월에 열리는 ‘프리즈 서울’ 아티스트 어워드 수상자이기도 하다. 초현실적 현상이나 인간의 믿음과 결탁한 종교적 경험을 자연과학의 여러 징후들과 연결시키는 그는 이 오래된 이야기를 가장 최신의 기술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놓는다. 허무맹랑한 소문이나 미신을 믿는 보통 사람들의 옆에서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반짝이는 작가의 모습은 전지전능한 신이나 하늘과 땅을 매개하는 샤먼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세계의 이쪽과 저쪽을 오가는 ‘작은 새’나 ‘상냥한 바람’ 같다. 작업의 일환으로 양지바른 묘지를 종종 산책한다는 그와 작업실 인근의 조용한 무덤을 찾았다. 비 오는 아침의 무덤 주위는 살아 있는 것들로 가득했다.

서울 ‘프리즈 아티스트 어워드’ 후원으로 제작된 3채널 영상 설치미술 작품 ‘카밍 시그널’ (2023/ 2025)의 컨셉트 이미지.
홈페이지(www.imyoungzoo.com) 소개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알쏭달쏭한 단어와 기호의 연속이에요. ‘해꽃이·오메가/총총 悤悤/돌, 요정, 미련은 물질이며 신령이다… 존경하는 한국 국민에게 드림/○★○: 100 Ω/인간과 나’…
제가 좋아하는 단어를 모아서 보여주면 절 소개하는 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인간과 나>는 직접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해요. 요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이상하게’ 이어져 오는 전승 같은 것에 관심을 갖고 있어요. 전통이든 미신이든 원래의 형태 그대로 계승돼 온 건 아니잖아요. 어디서 온 건지 모르지만 막연히 헤아릴 수 있는 것들, 영원할 줄 알았는데 사라져버린 것들. 그런 것에 관심을 둡니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홍콩할매귀신 등 설화와 괴담, 관상학, 우주과학까지 당신은 시공간을 초월한 ‘믿음’의 세계를 탐색합니다. 국현에서 열리는 전시 <고 故 The Late>는 무엇에 대한 이야기인가요
오래된 것, 그러니까 ‘고물’을 다시 보는 이야기예요. 그 고물들은 특별한 걸 보기 위한 기술과 관계 있다고 생각하는데, 단순하게는 아날로그 TV 같은 것들이요. <인간과 나>에서 주로 하는 이야기가 신체의 한계를 넘어 외부 세계로 이동하길 원하는 사람들의 환영과 환청, 과학 기술이에요. 동아시아에서는 오래전부터 명상이나 호흡법, 축지법 같은 신체 수련을 많이 했고, 그 수련이 실패한 결과로 만들어진 게 오늘날의 테크놀로지 기술(VR; 인공지능)이라는 제 나름의 가설을 세운 거죠. 이번 전시에서는 기술도 오래된 시도나 고물처럼 다뤄집니다. 그리고 빈 무덤 같은 빈 공간(전시장)을 보려고 해요.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25’ 전시 <고 故 The Late>(2023~ 2025)는 영상과 소리, 물체, 퍼포먼스, 홈페이지, 책으로 구성돼 있다.
자신의 미래 묫자리를 찾아가는 VR 체험 전시 <미련>(페리지 홀&갤러리, 2024)처럼 말이죠
그때는 관객이 VR 기기를 머리에 쓰고 빈 무덤가를 갔다면, 이번에는 전시장 자체가 빈 무덤인 거죠. VR의 360° 공간처럼 앞뒤나 위아래도 있어 직접 몸을 움직이면서 볼 수 있는 환경을 생각해 봤어요.
무덤에서 관객이 보는 것은 무엇인가요? 죽기 전 눈앞을 스치는 일생의 기억 같은 건가요
네. ‘주마등’이 천장 모니터와 연계해 360° 회전하며 돌아가고, 눈앞의 모니터들과 동기화돼 앞은 앞을 보는 장면, 뒤는 몸을 돌렸을 때 보이는 장면이 나오죠. 어떤 장면은 인물1이 보는 1인칭 시점이라면 또 다른 장면은 누군가 인물1을 찍는 목격자 시점이 나오기도 해요. 저도 처음이라 ‘과연 작동이 잘될 수 있을까?’ 작업하는 내내 고민했어요.
“거주하는 공간에서 뭔가를 본다는 건 인간한테 큰 영향을 끼친다”고 말한 적 있어요
2021년 고양 레지던시에 있을 때 제가 배정된 방 바로 앞에 묘지가 하나 있었어요. 창문 앞이 양지바른 묘지 뷰였죠. 작업실 주변에 아무것도 없고, 저는 차도 없어서 일단 들어가면 작업하거나 창밖을 보는 것 외에 할 게 없었어요. 그때 그 풍경을 보면서 묘지 안을 상상하곤 했어요. 저 안에 있는 사람은 참 좋겠구나….
‘좋겠구나’라고요
죽어서도 저렇게 볕 잘 들고 풍수 좋은 자기 땅이 있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작업실에 온 분에게 그 무덤이 비어 있는 ‘허묘’일 거라는 얘길 들었어요. 반드시 누군가 있으리라 생각했던 곳이 텅 비어 있다니까 더 적극적으로 제가 들어가 눕는 걸 상상하게 된 거죠.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아, 옛날 사람들이 가짜 무덤을 만든 게 관념적 이유뿐 아니라 실질적인 마음의 위안이나 만족을 얻기 위해 그랬을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가상공간을 만드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고, 이 허묘라는 게 우리나라 최초의 메타버스 같은 개념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가상현실에서 무덤을 찾아가는 작업을 시작했어요.

임영주 작가.
사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요. 최첨단 과학의 시대에 살면서 여전히 전생이나 미래를 궁금해하고, 별자리를 믿잖아요. ‘우린 어디에서 왔을까’ 하는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오히려 더 근원적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도 있고요. 지금 신기술이나 하이 테크놀로지라는 게 진짜 하이 테크놀로지인가 하는 의문도 들어요. 어떻게 보면 저는 ‘이렇게 쓰라고 만든 AI가 아닐 텐데’ 이렇게 AI를 쓰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사용하라고 메타에서 VR 오큘러스를 만든 게 아닐 텐데’ 이런 식으로 테크놀로지를 사용하기도 해요.
그런 의미에서 ‘칼을 입에 물고 거울을 보면 미래가 보입니다’도 재미있어요
맞아요. 밤 12시에 세숫대야에 물을 가득 받고 칼을 입에 문 채 아래를 보면 미래의 배우자가 보인다는 옛날얘긴데, 지금 우리가 챗GPT에 질문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요. 그게 진짜 기술적으로 통하는 것처럼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고, 칼을 입에 물기도 하고, 또 카메라를 물고 하늘을 보면 과거를 본다는 설정 같은 걸 하기도 했어요.
심은하 주연의 1990년대 드라마 <M>과 14세기 이탈리아의 소설집 <데카메론>이 병치되는 구조도 흥미로워요
코로나19 때 여행하거나 사람 만나는 일이 어려워지면서 제가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응답할 만한 분들을 추천받아 메일을 주고받았어요. 흑사병이 돌던 시기에 쓰인 <데카메론>도 기본적인 기획은 ‘이 종말 같은 시기의 지루함을 견디기 위해 우리 이상한 이야기라도 하며 시간을 보내자’였거든요. 중세부터 전해진 역사적 사건이나 민담뿐 아니라 음담패설도 섞여 있고요. 선명한 목적은 없었지만 그런 식으로 각자 이야기를 풀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거죠. 제가 먼저 “한국에서는 예전에 드라마에서 M이 녹색 눈을 하고 ‘너희는 바이러스에 전멸될 거야’라고 예언했어”라고 하니까 “내 기억에도 이런 예언이 있었어” 하면서 사람들의 글과 이미지가 모였고, 그렇게 ‘Waiting M’이라는 작품이 나왔어요. 사실 코로나19 이전엔 해외 필자나 해외에 사는 다른 누군가와 협업한 적 없는데, 그 기억이 좋아서 이번 전시까지 이어온 거죠.

코로나19 팬데믹의 상황을 1990년대 드라마 <M>의 스토리와 연결 지은 단채널 영상 작품 ‘Waiting M’(2021~2025).
무슨 <전설의 고향> 같네요. 시리즈 보면 끝에 ‘이 얘기는 700년 전 어느 지역에서 전해져 온~’ 이런 내레이션이 나오잖아요
맞아요. 그런데 ‘고(故)’라는 영상을 보면 “내가 진짜 옛날이야기를 해줄게요. 당신이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옛날의 이야기예요” 이런 식의 내레이션이 반복되거든요. 과거에 ‘몇 년 몇 월에 이런 사실이 있었다’는 아닌 거죠. 시대착오적인 미래를 얘기하는데 그럴싸해 보이기도 하고.
10월에는 퍼포먼스가 예정돼 있어요
영상에서도 제가 흰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장면이 있는데, 퍼포먼스 때도 그런 옷을 입고 다 함께 죽는 연습 같은 걸 해보려고요.
사는 연습이 아니라 죽는 연습인가요
그걸 저는 ‘미래 흔적 연습’이라고 부르는데, 함께 모여 이상한 소리도 듣고, 이동해서 때를 기다렸다가 이제 시간이 되면 다 같이….
설마 하직하는 건가요
하하. 잠깐 다른 세상으로 가는 걸 상상했다가 돌아오는 그런 거죠. 제 역할은 말하자면 까마귀 같은 거예요. 흉흉한 일이나 뭔가 조짐이 있을 때 까마귀가 우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날씨와 관련된 가담항설을 다룬 <오늘은 편서풍이 불고 개이겠다>(2016) 전시 전경. 스페이스 오뉴월에서 열렸다.
프리즈 서울에서 선보이는 리서치 기반의 신작 ‘카밍 시그널(Calming Signal)’은 어디서 출발한 이야기인가요
저는 원래 확정된 결과나 밝혀진 사실보다는 징후나 증상 같은 것에 더 관심이 많아요. 올해 프리즈 서울의 주제가 ‘Future Commons’였는데, 제가 진행하던 리서치와 잘 맞아서 제안을 드렸고, 운 좋게 선정되었어요. 시작은 사실 단순했어요. 미래사회의 공유자원이나 거대한 아젠다에서 출발한 게 아니라, 저를 GPT처럼 이용하는 엄마의 사소한 질문에서 비롯된 거예요. 엄마가 강아지를 키우시는데, 조금만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여도 저한테 물어봐요. 이번에는 강아지가 자꾸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돈다고 하시더라고요. 찾아보니까 그게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하는, 유전자에 박힌 본능적 행동이더라고요. 그렇게 동물의 카밍 시그널을 찾아보다가 인간에게도 비슷한 제스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자연과 하나가 되기 위해 반복적으로 하는 몸짓, 특히 강아지처럼 제자리를 도는 회전춤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회전춤은 문화권마다 조금씩 다르기도 한데, 어떤 춤은 심지어 지구의 자전축과 각도를 맞추는 방식으로 이어져 있더라고요.
생존 본능에서 비롯된 동물의 무의식적 동작과 회전 춤이라는 집단적 제스처가 환경 문제를 비롯해 모든 게 불안정한 사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집니다. 벽면을 파란색 격자무늬로 처리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위도와 경도 같은 축을 표시하는 건데요, 사실 제가 뉴욕 아망트 리서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던 중에 이 전시 공간 구성을 구상하게 되었어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람이 거주 공간에서 무엇을 보느냐가 굉장히 중요한데, 당시 제가 쓰던 작업실 창문이 흰 벽을 마주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제게 풍경은 테이블 매트로 대체되었어요. 책상 위에 까는 파란 보호 매트요. 그 경험이 이번 전시 공간의 구상으로 이어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현대인의 기본 색상은 자연의 색이라기보다 쨍한 파란색과 녹색인 것 같아요. 컴퓨터 화면의 세이프 스크린이나 크로마키 배경 같은 것도 그렇고요.
당신이 믿고 싶은 건 무엇인가요
대답이 될지 모르겠지만, 전 사람들이 같이 뭔가를 보려 하고 믿으려 할 때의 몸짓이 귀엽고,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그 에너지가 좋거든요. 전시장에서 흥미로운 작품을 자세히 보려고 할 때 보이는 눈빛이나 행동도 그렇고요. 그걸 제가 믿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런 ‘헛것’ 을 보는 마음을 좋아합니다.
Credit
- 에디터 이경진
- 컨트리뷰팅 에디터 이미혜
- 사진가 이우정
- 헤어 메이크업 아티스트 장하준
- 아트 디자이너 정혜림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
- COURTESY OF THE ARTIST·MM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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