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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암동 구옥에 자리한 금속공예가 윤여동의 작업실. 주물로 빚은 ‘안트로포’ 시리즈의 스툴과 타원형 테이블, 스크린이 버건디 컬러 카펫 위에 놓여 있다.
서울 후암동 골목에는 솜틀집이 있다. 작은 문구점이 있고, 백반집이 있고, 초등학교도 있다. 자동차 경적 소리 대신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와 지저귀는 새소리가 담장 너머로 들린다. 금속공예가 윤여동이 새 작업실 자리로 이 동네를 택한 이유다. “용산이지만 한남동이나 이태원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요. 좀 더 사람 냄새가 난달까요?” 그는 종로구 평창동에 산다. 중학교 때 가족이 이사한 뒤 줄곧 그 동네에 머물렀다. 교통은 다소 불편해도 새소리를 들으며 아침을 맞는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작업실 한 귀퉁이,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에 걸린 금속 하트 오브제.
신라 금관의 달개 장식에서 영감받은 금속 오브제의 디테일.
‘안트로포’ 시리즈의 콘솔과 달개 디테일의 벽면 오브제가 어우러진 장면.
고재 선반 위에 층층이 놓인 윤여동의 작품들.
첫 작업실은 서촌의 한옥이었다. 중정이 있는 한옥을 가진 노부부가 일부를 임대로 내준 공간이었다. 그 다음은 부암동. 평창동 집에서 가깝고, 서촌과 비슷한 결의 동네였다. 이후 넉넉한 공간이 필요해 새로운 작업실을 마련하면서 윤여동이 세운 기준은 단순했다. “한강 건너 강남으로 가고 싶지 않았어요. 빽빽한 건물이 있는 곳도 싫었죠.” 그렇게 찾다가 도착한 곳이 후암동 구옥이다. 마을의 정서가 남아 있는 후암동은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개념 ‘정중동(靜中動)’과도 닮았다. 조용한 가운데 움직임이 있다.
오래된 약장의 수십 개 서랍에 금속 판을 덧대고 금속 오브제들을 놓은 자리.
윤여동의 작업 이력이 칸칸이 든 나무 선반.
망치질 흔적이 남은 은빛 버킷에 하얀 카라를 꽂았다.
작업실 안에는 완성되지 않은 작업들이 놓여 있었다. 스툴과 사각 테이블, 타원형 테이블, 콘솔, 병풍처럼 생긴 스크린. 주물 방식으로 만든 금속 가구들은 쇳물을 녹여 틀에 붓고, 굳은 것을 꺼내 사포로 갈고 광을 내 만든다. 판재를 성형한 오브제와는 전혀 다른 작업으로 나아갈 수 있다. 윤여동은 자신의 작업이 가진 특징을 이렇게 말한다. 유기적 형태와 너무 반듯하지 않은, 누가 봐도 사람이 만들었을 것 같은 느낌. 이런 특징을 가구에 접목하려면 판재 성형보다 곡선을 살릴 수 있는 방식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은 주물. “프랑스에서 오브제 디자인을 전공했는데, 금속 작업을 전문적으로 시작한 건 대학원 진학 때였어요. 서울대학교 금속공예 석사 과정을 거치면서 금속의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알게 됐죠. 숟가락처럼 손 안에 쥐어지는 크기의 물건을 만드는 게 재미있었습니다. 대표작이 된 와인 버킷 ‘가니메드(Ganymed)’ 시리즈 등 라이프스타일 오브제 작업으로 이어졌고요.”
서로 교차하며 올라가는 적동 촛대. 반듯하지 않은 선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다.
마감 전의 소반 시리즈.
토치와 집게, 아직 형태를 찾는 중인 황동 조각들이 놓인 작업대. 빛나는 것들은 모두 여기서 시작됐다.
그간 협업한 브랜드 이름이 새겨진 금속 도장들.
몇 년이 지나 가득 메우는 큰 가구 작업을 하고 싶었지만 가구는 장신구나 소품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했다. 수평이 맞아야 하고, 하중을 견뎌야 하며, 구조적 안정성과 사용자의 편의성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케치를 오래 했으나 제작할 수 있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는 확신을 얻기 위해, 큰 작업을 하기 위해 작업실을 옮겼다. “처음에는 스툴을 만들었어요. 샘플만 네다섯 번 제작했죠. 스툴을 완성하고 나서 ‘테이블도 되겠다’ 싶었고요. 조금씩 확장해 가고 있습니다.”
후암동 스튜디오에서 금속공예가 윤여동.
그의 첫 가구 시리즈 이름은 ‘안트로포(Anthropo)’. 인간을 뜻하는 그리스어 ‘안트로포스(Anthropos)’에서 가져왔다. “어느 날 제가 만든 스툴 다리를 보다가 갑자기 사람 다리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앉는 부분에서 바닥으로 내려오면서 자연스럽게 얇아지는 형태가 어쩐지 섹시했어요. 하이힐을 신겨봐도 재밌겠다 싶었죠.” ‘안트로포’ 시리즈는 하나의 조각에서 출발해 가지를 뻗듯 확장됐다. 스툴 다리 형태를 두 개 이어 붙여 테이블 다리를 만들었다. 또 일부를 잘라 재조합하면 콘솔 다리가 됐다. “사각 테이블 상판에는 장미 꽃잎이 겹쳐지는 결을 새겼습니다. 주물을 붓기 전, 결을 따라 판 것이에요. 그 흔적이 주물에 그대로 찍혀 나왔죠.”
산화된 금속 스크린 너머, 열린 문 안쪽에 작업 공간이 있다. 보여주는 공간과 만드는 공간이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뉜다.
스케일이 큰 금속 작업에서 관건은 항상 무게다. 주물은 판재보다 무겁다. 하지만 판재로는 낼 수 없는 형태와 미감이 있기에 주물로 가구 작업을 이어간다. 사용하면서 생기는 긁힘과 결함, 탁해지는 색깔, 묻어나는 지문까지. ‘차가움’으로 통용되는 금속은 사람의 손을 타면 변하는 재료다. “저에게 금속은 차갑지 않은 재료예요. 오히려 따뜻하죠. 본연의 재료가 주는 이미지도 그렇습니다. 금색이나 로즈골드 컬러는 보기에도 따뜻하죠. 은이 변색되면 무척 자연스럽고요. 금속이 시간 흐름을 반영하는 재료라는 게 정말 좋아요.” 윤여동이 새 가구 시리즈인 ‘안트로포’를 처음 공개하는 건 5월 말 오픈 하우스에서다. 6월에는 코펜하겐으로 간다. 세 군데에서 전시에 참여하는데, 덴마크의 한 브랜드와 협업해 처음으로 가네샤, 라피스라줄리 같은 유색 돌을 금속에 박는 작업도 선보일 예정이다. 프레드와 카시아 커플이 운영하는 플랫폼 ‘아티클(Article)’에는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컬렉션을 내게 됐다. 컵과 버킷, 바스켓까지. 지난 첫 번째 컬렉션 작업을 하다 남은 금속 조각을 이어 붙여 하나씩 완성한 것들이다.
김범 작가의 작품집 <바위가 되는 법>과 윤여동 작가의 금속 오브제. 작업실 선반 위의 우연한 배치가 하나의 문장처럼 읽힌다.
빛이 들어오는 창가에 오브제들이 조용히 서 있다. 역광 속에서 더욱 따뜻한 색으로 빛나는 금속 작품들.
금속 가구와 소품뿐 아니라 필요한 집기를 제작하는 작업실 곳곳에는 작가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다. “평일엔 매일 작업실에 옵니다. 도착하면 환기부터 하고 향을 피워요. 메일을 확인하고 나서 작업에 들어갑니다. 2층 휴식 공간에 아버지가 설치해 준 앰프로 음악을 듣어요. 요즘은 주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을 듣는데, 수세미질이나 청소처럼 몸을 격렬하게 써야 할 때는 테일러 스위프트나 아리아나 그란데의 트랙으로 바꾸기도 합니다(웃음).” 그가 새로운 작업실에서 가장 좋아하는 자리는 자신이 작업한 은빛 콘솔 앞. 콘솔과 함께 신라시대 금관처럼 달랑거리는 장식이 달린 거울 오브제를 벽면에 걸었다. 따뜻한 실버 톤이 감도는 공간이다.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데, 나만의 집이 생기면 콘솔 위에 화병이 놓인 거실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여기서 실현한 거죠.” 작업실 뒷마당에는 이 동네 새들이 즐겨 찾는 감나무가 있다. 그 옆엔 복슬거리는 하얀 꽃이 풍성하게 피는 이팝나무가 섰다. 늦은 오후가 되면 방 안으로 나무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작업실 풍경을 바꾼다. 차갑다고 여겨온 것들에서 따뜻함을 찾고, 고요한 것들 안에서 움직임을 길어 올려온 윤여동의 작업이 늘 그래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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