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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생 로랑의 시그너처 룩이 된 르 스모킹 수트.
2026 가을 겨울 시즌, 생 로랑 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옷이 아니었다. 런웨이 끝에 우뚝 선 거대한 남성의 토르소.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의 조각상을 연상시키는 남성의 신체였다. 그리고 그 앞을 걸어나온 것은 칼날처럼 재단된 턱시도 수트를 입은 여성들. 매끈하게 빗어 넘긴 슬릭 헤어에 짙은 스모키 아이, 선명한 레드 립. 마치 1975년 헬무트 뉴튼이 포착한 사진 속 파리의 밤거리를 유유히 걷던 르 스모킹 차림의 여인이 2026년 런웨이에 되살아난 듯했다. 안토니 바카렐로는 오프닝을 여덟 벌의 수트로 채워 60년 전 이브 생 로랑이 시작한 ‘르 스모킹’ 유산을 다시 한 번 소환했다.
SAINT LAURENT
DOLCE & GABBANA
이번 시즌, 수트의 귀환은 생 로랑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돌체앤가바나는 허리를 강조한 핀스트라이프 수트에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녹여냈고, 지방시의 사라 버튼은 스리피스 수트로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완성했다. 구찌는 또한 윤기가 감도는 핀스트라이프 수트로 톰 포드 시절의 관능미를 떠올리게 했고, 발렌시아가는 기모노처럼 둥글게 깃을 세운 재킷 사이로 목선을 시원하게 드러내며 매스큘린한 수트에서 예상치 못한 여성성을 끌어냈다.
맥퀸은 라펠을 리본처럼 접어 드레시하게 연출한 수트를, 사카이는 수트 팬츠와 스커트를 레이어드한 룩을 선보였다. 제각각 달라 보이는 런웨이 위의 수트 룩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이번 시즌의 수트는 권위와 여성성을 대립시키지 않았다는 것. 오히려 둘은 자연스럽게 공존했다.
하지만 시작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풍경은 전혀 다르다. 1966년, 여성이 이브닝 웨어로 바지를 입는 것 자체가 금기였던 시대에 이브 생 로랑은 남성 턱시도를 여성의 몸에 맞게 재단한 ‘르 스모킹’ 룩을 선보였다. 그는 “수트를 입은 여성은 결코 남성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절제되고 깨끗한 재단은 여성성과 관능성을 동시에 강조한다”고 말했다. 믿기 어렵지만, 르 스모킹이 탄생한 1966년의 프랑스에는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바지를 입는 것을 제한하는 규정이 남아 있었다. 1800년에 만들어진 이른바 ‘여성 바지 착용 금지령’은 무려 2013년에야 공식적으로 폐지됐다. 실제로 수트를 입은 여성들은 출입을 거부당하기 일쑤였다.
미국의 패션 아이콘 낸 켐프너(Nan Kempner)의 일화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뉴욕의 레스토랑 ‘라 코트 바스크(La Côte Basque)’는 턱시도 차림의 켐프너를 거부했고, 그는 팬츠를 벗어 재킷만 미니드레스처럼 걸친 채 식사를 했다. 생 로랑은 당시를 회상하며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야유했다. 그것은 하나의 스캔들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세상의 야유 속에서도 이브 생 로랑은 자신의 혁명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은퇴할 때까지 모든 컬렉션에 반드시 한 벌 이상의 르 스모킹을 포함시키는 철칙을 고수했다. 형태는 끊임없이 변모했지만, 르 스모킹은 생 로랑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사라지지 않았다. 하우스의 주요 기념 쇼에서도, 2002년 은퇴 쇼의 피날레에서도 르 스모킹은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다. 수트는 지나가는 트렌드가 아니라 생 로랑이라는 하우스의 영혼이자 정체성 그 자체였다.
GIVENCHY
SAINT LAURENT
이 위대한 유산은 안토니 바카렐로 시대에 이르러 또 한 번 진화했다. 2025 봄 여름 컬렉션에서 벨라 하디드는 박시한 오버사이즈 수트와 넥타이 그리고 창립자 이브 생 로랑이 생전에 썼던 시그너처 안경을 착용했다. 남성의 옷을 빌려 여성에게 힘을 부여했던 과거를 넘어 이제 수트 자체가 젠더와 무관한 권위의 상징으로 확장된 셈이다.
그리고 세상도 달라졌다. 1971년 비앙카 재거는 웨딩드레스 대신 화이트 생 로랑 턱시도를 입고 결혼식을 올리며 패션사에 명장면을 남겼다. 이후 웨딩 수트는 더 이상 파격적 선택이 아니었다. 한때 논란과 혁명의 중심에 있던 옷이 어느새 가장 클래식한 선택지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시즌 안토니 바카렐로가 선보인 여덟 벌의 수트는 단순한 아카이브의 재현이기보다 기억의 환기에 가까웠다.
이제 수트는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클래식한 옷이 됐고,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달려 있다. 덜어내거나, 형태를 비틀거나, 의외의 여성성을 끌어낼 수도 있다. 그리고 르 스모킹은 여전히 그 모든 해석의 시작점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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