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프랑스에서 사진가로 만난 박찬욱 감독 인터뷰

박찬욱 감독의 사진은 그의 영화를 위한 해독제다. 통제를 잠시 내려놓은 순간, 목적 없이 걷고 우연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된다.

프로필 by 김이지은 2026.07.25

7월의 프랑스 남부 아를은 숨이 턱 막힐 만큼 뜨겁다. 체감온도는 40℃에 가깝지만, 누구도 더위를 핑계 삼지 않는다. 1970년에 시작한 세계 최대 권위의 사진 축제 <아를국제사진축제 Les Rencontres de la Photographie d’Arles>가 도시 전체를 전시장으로 바꾸는 계절. 옛 철도 정비창과 고대 로마 유적, 옛 성당, 수도원, 산업시설 등 도시 전체를 무대로 40여 개가 넘는 전시가 열린다. 사진가와 큐레이터, 미술관 디렉터와 컬렉터, 출판인과 평론가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사진계 종사자가 이 작은 도시로 모여든다.


아를에서 만난 박찬욱 감독. © David GIANCATARINA

아를에서 만난 박찬욱 감독. © David GIANCATARINA

아를의 빛이 머무는 이우환 재단미술관 속 박찬욱의 사진전. © David GIANCATARINA

아를의 빛이 머무는 이우환 재단미술관 속 박찬욱의 사진전. © David GIANCATARINA

고대 로마 원형경기장을 지나 이우환 아를 재단에 들어서는 순간, 밖의 열기와는 전혀 다른 공기가 흐른다. 그곳에 우리가 알던 박찬욱은 없다. 복수도, 폭력도, 치밀한 서사도 사라진 자리. 대신 빛이 스쳐 간 방수포와 오래된 나무, 눈이 녹아가는 풍경,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사물들이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전시명은 <Par un Matin Calme>, ‘고요한 아침’이다. 박찬욱의 사진전이 이 시기에, 그것도 이우환 아를 재단에서 열렸다는 건 국제 사진계의 공식 데뷔와 다름없다.


이번 전시의 큐레이터는 <르 피가로> 문화부 기자이자 미술평론가 발레리 뒤퐁셸(Vale′rie Duponchelle). 그녀는 2014년 프랑스에서 아직 덜 알려진 박찬욱을 인터뷰했다. 영화를 취재하던 기자는 오히려 박찬욱의 사진에 매료됐고, 결국 그의 첫 해외 사진전을 기획하게 됐다. “<올드보이>부터 <헤어질 결심>까지 그의 영화는 폭력의 안무이자 인간의 도덕적 딜레마를 탐구한 작품들이다. 하지만 사진에는 잔혹함도, 성적 긴장도 없다. 침묵이 있고, 시간이 잠시 멈춘 순간만 있다. 그의 사진은 영화의 해독제다.”


Faces 16, 2013

Faces 16, 2013

Show window, Oct 2025, London, UK

Show window, Oct 2025, London, UK

뒤퐁셸은 박찬욱의 사진에서 세 가지 아름다움을 읽어낸다. 첫 번째는 누구나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미지다. 영화 <아가씨>에서 김민희가 기모노를 입고 등장하는 장면처럼 말이다. 두 번째는 차고의 방수포가 기모노를 닮은 것처럼 평범한 사물이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한다. 마지막은 우연과 유머다. 예상치 못한 만남과 엇갈린 시선이 만들어내는 작은 기적 같은 순간들. “영화에서 박찬욱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사진 앞에서는 다른 사람이 되죠.” 박찬욱의 사진에는 후보정도, 인공 조명도 없다. 오직 기다림과 발견만 있을 뿐.


그는 44년 동안 영화를 만들어왔다. 그리고 같은 시간 동안 세상을 발견해 왔다. 아를에서 공개된 건 사진이 아니라 영화가 미처 담아내지 못했던 박찬욱의 또 다른 시선이었다. 이제 그는 영화감독뿐 아니라 사진가로도, 자신의 시간을 세상과 나누기 시작했다. 아를에서 허락된 인터뷰 시간은 길지 않았다. 질문 하나를 건네면 박찬욱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고, 말을 고르고, 문장을 완성한 뒤에 입을 열었다. 그 느린 호흡은 전시장에 걸린 사진들과 닮아 있었다.


Jan 2025, Jeju, Korea

Jan 2025, Jeju, Korea

Face 115-2012

Face 115-2012

‘고요한 아침’은 하루의 시간이라기보다 하나의 마음 상태처럼 읽힙니다. 감독께서 오래 갈망해 온 풍경일까요

일상에서 고요한 시간은 사치처럼 느껴져요. 잘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죠. 정확히 말해 동경하는 겁니다. 제가 늘 얻고 싶은 상태이기도 하고요. 늘 해결해야 할 일들이 쫓아오는 삶이다 보니 더 갈구하는 상태가 되기도 하고요. 사실 정적으로 보이는 이미지도, 어제 자다가 발견하고 찍고…. 그런 식으로 촬영된 게 많거든요.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건 한가하고 평화롭고 고요한 것이라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겠지, 하는 거죠.


영화에서는 모든 것을 설계하고 통제하는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반대로 사진에서는 우연을 기다리는데, 어떻게 그런 전환이 가능할까요

저는 모든 걸 통제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죠. 영화 속 모든 장치를 인위적으로 꾸며내고, 관객의 마음을 조정하는 종류의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에요. 그게 부끄러운 건 아니고, 제가 지향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그것만으로 풀리지 않는, 다른 종류의 표현 욕구 같은 게 좀 있는 것 같아요.


감독님은 카메라를 “삶의 동반자”라고 표현한 적 있어요. 그렇다면 사진은 영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기록하는 작업이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일부러 어떤 피사체를 찍기 위해 여행을 떠나거나 절경을 찾아다니진 않습니다. 다만 화장실까지 카메라를 가지고 다닐 만큼 신체의 일부이자 삶의 동반자로 여기죠. 일할 때도 항상 두리번거리면서 뭔가를 찾고, 삶의 한 장면을 기록합니다. 그렇다고 사진 작업이 일기 같은 것이냐 하면 또 그렇지는 않아요. 아주 사적인 생활을 묘사한 사진은 아니거든요. 어디까지나 특정한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빛이 좋지 않으면 내일 다시 가서 찍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위적 조명 없이 시간대를 기다려서 찍기도 하고, 집 근처의 산이라면 몇 년 동안 지나다니면서 찍고 또 찍고 해서 그중에서 몇몇을 골라내기도 하죠.


White Flag, Jul 2021, Paju, Korea

White Flag, Jul 2021, Paju, Korea

akone, 2017

akone, 2017

Think Deep, Mar 2024, Paju, Korea

Think Deep, Mar 2024, Paju, Korea

Port de Micho, 2013

Port de Micho, 2013

전시 작품을 보면 나무, 방수포, 전봇대처럼 평범한 사물이 주를 이룹니다. 평범한 사물 속에서 ‘지금이다!’라는 걸 알아보는 감각은 어떻게 찾아올까요

영화를 만들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물론 영화는 꾸며내는 것이고 사진은 발견하는 것이지만요. 나를 둘러싼 수많은 피사체 중에 무엇을 고를 것인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이 길을 걸어갔는데 왜 나만 이곳에 주목할까. 왜 있잖아요. 옛날 초현실주의자처럼 수술대 위의 재봉틀과 우산, 전혀 다른 소재들이 서로 만났을 때 생기는 이질감 같은 거요. 정말 하찮고 무가치한 사물에 기적적인 빛이 닿는 순간. 하찮은 것과 성스러운 것이 만났을 때 생기는 놀라운 순간들. 아무도 보지 못한, 그 순간의 제 시선을 남기고 싶은 거죠.


영화가 ‘창조’라면 사진은 어떤 행위에 가깝나요

발견이죠.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조명하지 않고, 햇빛을 기다리며 오로지 발견하는 것.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것을 내가 알아차리는 순간 말이죠. 내가 찾아냈다, 내가 기다려서 얻은 즐거움입니다.


44년 동안 작업해 온 사진을 처음 공유하게 됐습니다. 어떤 마음인가요

해외 전시는 처음이라 제겐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죠. 따져보니 제가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지 44년이 지났더라고요. 감개무량합니다.


The Handmaiden, Kim Taeri VI

The Handmaiden, Kim Taeri VI

Mademoiselle Minhee Kim

Mademoiselle Minhee Kim

Decision to Leave, Tang Wei and Massager, Dec 2020, Busan, Korea

Decision to Leave, Tang Wei and Massager, Dec 2020, Busan, Korea

이우환 화백의 공간에서 전시를 연다는 건 감독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두 사람의 작업이 닿아 있는 지점도 있는지 궁금합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보던 미술 잡지에서 이우환 선생님의 작업을 많이 봐왔어요. 파란색 점이 찍혀 있는 작품들이요. 어릴 때부터 참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만남이 이뤄진 게 운명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우환 선생님의 마음에 들었다는 사진 작품을 보면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습니다.


이번 전시는 자신의 사진 작업을 돌아보는 계기였을까요? 아니면 앞으로 작업을 이어가고 싶은 확신을 줬을까요

사진 작업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이번에 포함되지 않은 작품도 많아요. 이번 전시는 전부 디지털로 찍은 건데, 필름카메라로 찍은 것들을 뒤져서 그것만으로 뭔가 만들어봐야겠다, 필름을 다시 한 번 시도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게 많아졌습니다.

장면처럼 배치된 사진들은 하나의 이야기보다 여러 개의 시선을 제안한다. 전시는 10월 4일까지.

장면처럼 배치된 사진들은 하나의 이야기보다 여러 개의 시선을 제안한다. 전시는 10월 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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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김이지은
  • 사진 박찬욱
  • 아트 디자이너 김민정
  • 디지털 디자이너 석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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