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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검정색 대신 버건디 가방을 들어야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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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7일 밤, 칸 뤼미에르 대극장. <호프> 상영이 끝나자 2300석을 채운 객석에서 기립박수가 길게 이어졌다. 여기까진 칸영화제의 의례다. 하지만 상영 중간, 최소 세 번 정도 객석에서 갈채와 환호가 튀어나왔다. 영화제 개막 한 달 전,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은 경쟁 부문 라인업 발표에서 “끊임없이 장르를 바꾸며, 지금껏 한 번도 이야기된 적 없는 역사의 한 부분을 펼쳐냈다”며 <호프>를 소개했다. 장르라고? 칸이 ‘장르’를? 아니나 다를까? 칸에 내리 꽂힌 <호프>(칸 프리미어 상영 직후의 호불호 리뷰와 무관하게)는 79년 역사를 이어온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처음 만나는 ‘외계인’ 같은 영화였다.
이 ‘장르영화’를 경쟁 부문 한복판에 세운 칸영화제의 결정 자체가 이미 격앙된 선언처럼 들렸다. 고백하자면 폐막식 당일 오후까지 모두 <호프>가 뭔가 받을 줄 알았다. 나도 그랬다. 칸영화제의 관례에 따르면 폐막식 당일 점심 즈음부터 오후 3~4시 사이에 수상작 감독과 배우들은 “가능하면 폐막식에 참석해 달라”는 정중한 요청을 받는다. 그 소식은 당연하게도 기자들에게 거의 동시에 도착한다. 오후 4시가 넘었는데도 전화기가 조용했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깝지만, 아쉽진 않다. <호프>를 잃은 건 칸이니까.
그리고 7월 초, <호프> 기자 시사회를 3일 앞두고 만난 나홍진 감독은 그 사이 더 말라 있었다. “오늘도 인터뷰 끝나고 CG 컷 몇 개를 더 봐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목소리나 표정은 밝았다. <곡성>(2016) 이후 꼬박 10년 만에 신작 <호프>로 돌아온 나홍진 감독과 칸에서부터 서울까지, <곡성>에서부터 <호프>까지, 나홍진의 엔터테인먼트에서 시네마까지 물었다.
칸에 다녀온 지 한 달 반이 지났습니다. 칸에서 뵀을 때, 하루에 1시간도 못 자는 강행군이라고 들었는데 요즘은 어떠세요
그때보단 낫죠. 후반작업이야 마지막까지 해야 하는 거고. 오늘도 인터뷰 끝나고 CG 컷 7개를 만져야 해요.
뤼미에르 극장 상영 4일 전에 <호프> 편집본을 넘겼다는 말에 다들 대경실색했습니다. 정확히 어떤 상황이었나요
제대로 말씀드리면 칸에 갈 수 없었어요. 가면 안 됐어요. 이 영화가 크리처 샷만 400컷이 넘는데, 어떤 컷은 렌더링(이미지와 오디오 생성 변환) 한 컷 뽑는 데 4일이 걸려요. (인터뷰 룸을 둘러보며) 영화 전체를 뽑는 데는 한 달이 걸리고요. 그러니까 개봉 넉 달 전에 후반작업을 할 시간 한 달을 통째로 내준 거죠. 진짜 시간이 없었습니다. 사운드도 문제였어요. 애트모스 작업 중이었는데, 이건 극장에서 듣지 않으면 알 수 없거든요. 시간이 없으니 극장에서 모니터링을 하지 못하고 귀 대중으로 “여기는 몇 데시벨 올려주세요” 하면서 사운드를 만졌어요. 또 자막을 붙여야 하니까, 상영 4일 전에 파리에서 DCP(극장 상영용 데이터)가 만들어졌는데, 저는 그때 비행기에 있었어요. 그래서 테크니컬 시사를 전 세계 최초 상영 하루 전날 칸의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한 거죠(웃음). 2000여 석의 극장이니까 “최대한 사운드를 키워 달라”고 부탁했는데, 이미 사운드가 ‘최대치’로 만져진 상태였어요. 전 몰랐어요. 그 말이 내게 전달이 안됐거든요. 레드 카펫을 밟고, 손 흔들고, 극장 들어와 앉아서 영화를 시작하자마자 ‘아 큰일났다!’ ‘지금 나가서 사운드를 줄일 방법은 없나?’ ‘영사 기사님은 어디 계시지?’ 그 생각밖에 안 났어요. 지옥 같았습니다.
경쟁 부문 최초 상영에서 감독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 그것도 전대미문이었을 겁니다
화장실은 갈 수 있잖아요(웃음). 그 자리에서 정말 죽을 뻔했어요. 옆에 앉은 배우들에게 막 설명하고. ‘이게 사운드가 왜 이러냐면….’ 그런데 영화는 왜 이렇게 길어! 2시간 40분을 그러고 앉아 있었으니…. 상영회가 끝나고 다시 극장 밖 레드 카펫에서 사진을 찍는데 제 표정이 좋을 수가 없죠. 그 사진에 누가 댓글을 달았더라고요. ‘영화가 폭망한 표정’이라고(웃음).
그래서 무대 인사에서 “이렇게 긴 영화를 끝까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했군요
진심이었어요.
모든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칸이 <호프>를 경쟁 부문에 초청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이 나 감독을 직접 찾았다는 외신 보도도 있었어요
정확히 절 찾아온 건 아니고요. 2025년 부산국제영화제 저녁 자리에서 만났어요. 티에리 프레모가 칸에 <호프>를 출품할 수 있겠냐고 묻더군요. 저는 이번엔 못 간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4월 말까지 영화를 보내 달라”는 거예요. 일반적으로 경쟁 부문 초청작은 3월 초에 출품해야 하거든요. 4월에 라인업을 발표하고 5월에 영화제가 시작하니 4월 말까지 보내면 된다는 거예요. 저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니 논의해서 4월 말까지 보내기로 했는데, 경쟁 부문 공식 발표가 4월 9일이라는 겁니다. 추가 발표가 있긴 하지만, 공식 발표 리스트에 포함돼야 칸에서도 좋은 상영을 받을 수 있다고요. 그래서 3주 당겼어요. 그러다 보니, 저런 일이 벌어진 거죠.
하지만 감독님이 걱정한 기술적 디테일을 따질 겨를도 없이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보다가 펜과 노트를 그냥 내려놨어요. 머리 쓰고 싶지 않더라고요. 전 세계 미디어와 영화계 관계자 2000여 명이 앉아 있는 극장에서 영화 중간중간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오는 걸 보면서 다들 팔짱 풀고 보는구나 싶었죠. 상영 직후에 ‘호불호’로 보도됐지만 대부분 CG 후반작업에 대한 기술적인 내용이었어요
실제로 제가 지금까지 고생한 부분이 크리처 CG가 맞으니까요.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 부분이고요. 다만 우리 영화는 애당초 제작비 자체가, 크리처가 이만큼 나오는 기존 영화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거의 20분의 1, 아니 40분의 1 제작비로 크리처 장면을 완성해야 했으니까요. 시작부터 스트레스였어요. 어떤 외신이 <아바타>를 목표로 했냐고 묻더군요. 아니요. <아바타>를 목표로 삼을 수가 없죠. 그럴 엄두도 안 나죠. <아바타>는 제작비가 4억 달러(약 5900억 원)인데, 시각효과에만 2억 달러가 들었어요. 어떻게 그 영화를 목표로 삼아요.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저는 그 이상을 원했던 것 같아요. 점점 현실에 눈뜨고, 발이 땅에 닿는 중인데…. 아직 발이 다 땅에 닿은 건 아니지만(웃음).
그럼 언론 시사회 버전이 최종인가요? 칸에서 160분이던 러닝 타임도 한국 개봉에서는 4분 줄었다고 들었습니다
반영이 될지는 모르겠는데, 오늘까지 CG 컷 몇 개를 더 봐야 해요. 기자 시사회가 사흘 남았고 한국 개봉이 2주 남았는데 아직도 컴퓨터그래픽을 하고 있어요. 그런 상황입니다.
이번 초청 과정을 보면서, 칸영화제가 나홍진 감독을 선점하겠다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프레모 위원장이 따로 전한 이야기는 없나요
글쎄요. 제가 알기로 이 양반(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은 장르영화를 안 좋아했어요. 이전에도 제 영화가 칸에서 상영되긴 했지만(나홍진 감독은 장편영화 데뷔작 <추격자>부터 <호프>까지 네 작품 모두 칸영화제 초청을 받았다), 비경쟁 부문과 주목할 만한 시선이었잖아요. <곡성>(2016) 때는 끝까지 타진하다가 ‘영화가 너무 상업적이다, 너무 장르적’이라며 결국 비경쟁 부문으로 초청했거든요. 제가 제작한 <랑종>(2021)도 <셔터>를 만든 태국의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 작품인데, 이 감독은 꼭 칸에서 주목해 줘야 한다고 이메일까지 보냈는데 안 받아주더라고요. 발표가 난 다음에 미안하다고 답장이 왔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자꾸 찾아와 말을 걸고, 영화가 너무 좋다고, 계속 장르 이야기를 하고, 폐막식 전날에도 저녁 먹자고 초대하고. 영화제는 정말 모르겠습니다(웃음).
그러게요. 영화제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지난 이야기지만 폐막식 당일까지 기자단에서 수상을 기대하고 있었어요. 워낙 들려오는 첩보가 많았으니까요. 폐막 전날 추가 상영이 잡히고, 예정에 없던 위원장 주최 디너에 초청받고. 아! 일본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호프> 보려고 극장 앞에 줄 선 사진도 화제가 됐고요. 공식 일정이 너무 많아 경쟁 부문 감독들은 서로 영화를 볼 시간조차 없잖아요
맞아요. 일정이 이어지니까. 저도 다른 감독들 영화 한 편도 못 봤어요. 시간을 죽어도 안 주더라고요(웃음). 영화제 내내 아침부터 밤까지 공식 일정 소화하고, 새벽에는 서울과 후반작업 회의하고.
하지만 칸의 선택은 달랐어요. 기자들은 준비하고 있었단 말이죠
한 해에 그렇게 많은 영화가 쏟아지는데 칸영화제 경쟁 부문 22편에 제 영화가 선정된 거잖아요. 그걸로 기분 좋았어요. 저는 만족스럽습니다.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밥도 맛있는 거 사주고(웃음). 아, 올해 황금종려상을 받은 <루마니아>의 크리스티안 문지우 감독은 <호프>가 루마니아에서 촬영했다니까, 왜 자기한테 말 안 했냐고! 나중에 또 오면 자기 제작사에서 세금 환급 받아주겠다고요(웃음).
칸영화제에 여러 차례 초청받았지만 경쟁 부문은 처음입니다
칸영화제 프리미어 상영은 처음이잖아요. 그전에는 한국에서 개봉하고 결과가 나온 다음에, 편안한 마음으로 칸에 갔어요. 이번에는 미완의 최초 상영이에요. 내가 보지도 못한 영화를 들고 가다 보니 좋으면서도 두려웠죠. 기시감도 들었어요. <황해>(2010) 때 후반작업 딱 40일 해서 언론 배급 시사회 하던 그 느낌! 그때 기자들이 시사회 보고 좋은 이야기를 해주니까, 나는 기대를 좀 했어요(웃음). 이번에 경쟁 부문 초청받았을 때 홍경표 감독이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경쟁이란 게 초청 못 받으면 실망스럽고, 가면 또 상 못 받았다고 욕 먹는 자리다. 그리고 상은 더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라고요.
어느 순간, 내가 극장에서 보고 싶은 엔터테인먼트가 사라진 것 같더라고요. 제가 보고 싶었던 영화들이 사라져 가고 있었어요. ‘어, 이럴 건 아닌데. 이렇게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나라도 만들어보자’ 그렇게 된 거죠.
<호프> 이야기를 해볼까요
아, 하면 안 되는 짓이었어요. 시작 자체가 스트레스가 될 수밖에 없는 영화죠.
모르고 한 건 아니잖아요. 백주대낮에 외계인과 인간이 추격전을 벌이는 156분의 영화입니다. 밤 신 하나 없이요
2018년 여름에 속초에서 <호프>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어요. 시나리오가 나오자마자 VFX(시각적인 특수효과를 위한 영상제작 기법) 회사 대표에게 대포항에서 보자고 했어요. 이거 할 수 있겠냐고. “우리가 했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때부터 느끼고 있었어요. 이건 정말 어려운 일이고, 엄두가 안 나는 일이고, 사실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까지.
그런데 왜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나라 VFX는 이걸 해봐야 한다, 어느 정도 이상의 퀄리티를 뽑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기존 크리처 영화의 문법이 아니라, 아예 해본 적 없는 것. 대낮의 크리처는 레퍼런스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맨땅에서 시작했어요. 장비를 사고, 공부하면서, 5년에 걸쳐 만들기 시작한 거예요. 예측할 수 없는 위기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걸 다 풀어야 완성에 도달할 수 있는 과제였습니다. 지금도 스트레스예요. 하지만 ‘극장에서 봐야 하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던 참이었어요.
극장에서 봐야 하는 영화요
2016~2017년 즈음이었어요. 넷플릭스가 한국에서 막 주목받기 시작하던 시절이었죠. 넷플릭스와 만날 자리가 있었는데, 거기에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 대표들이 와 있는 거예요. 알고 보니 영화를 극장 개봉 대신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상영하는 방식을 논의하러 온 거였어요. 진짜 놀랐습니다. ‘이제부터 영화를 만들 때 내가 이 영화를 TV로 보여줄 건지, 극장에서 상영할 건지 결정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황정민 배우와 청불 스릴러영화를 기획 중이었는데,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극장에서 봐야 하는, 극장용 영화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최근 몇 년 사이 전 세계 필름 메이커들이 하는 고민을 빨리 시작했네요
지금 와서 보면 짧은 생각이었는데. 그래서 <호프>를 시작했다가 10년 동안 할 줄이야.
<호프>는 나홍진 감독이 순수하게 영화라는 엔터테인먼트의 쾌감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1980~1990년대 전 세계 장르영화 팬들을 행복하게 만든 클래식한 쾌감이 있습니다. 나홍진 감독님이 어린 시절에 극장에서 본 장르영화의 쾌감을 2026년의 관객에게 돌려주고 싶은 걸까 하는 상상도 했어요
어린 시절, 극장에서 본 영화 때문만은 아니고요. 예를 들어 마블의 <아이언맨>(2008)이 나왔을 때, 저는 너무 재미있게 봤어요. 뭔 영화가 이렇게 재미있나 하면서요. 그런데 10년쯤 지나니까 어느 순간, 내가 극장에서 보고 싶은 엔터테인먼트가 사라진 것 같더라고요. 제가 보고 싶었던 영화들이 사라져 가고 있었어요. ‘어, 이럴 건 아닌데. 이렇게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나라도 만들어보자’ 그렇게 된 거죠.
인터뷰는 나홍진 감독을 만나 '호프' 2편에 대해 물어봤습니다 기사로 이어집니다.
Writer 박혜은
」전 <맥스무비> 편집장이자 현재 영화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더 스크린> 편집장. 영화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베테랑 영화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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