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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바지만큼 ‘유행을 타지 않는 아이템’이 있을까? 특별히 차려입고 싶지 않은 날 무심코 집어 드는 아이템은 십중팔구 청바지고, 단체로 옷을 맞춰야 할 때면 무조건 찾게 되는 흰 티셔츠와 청바지의 조합은 두말하면 입 아플 정도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을 돌이켜보면 은근히 유행에 민감한 아이템도 청바지다.
새로운 핏이 유행하기 시작하면 얼마 전까지 잘 입던 청바지가 한순간에 촌스러워 보이곤 한다. 허리선은 어디쯤에 있어야 할지, 허벅지는 얼마나 조여야 할지, 발목에서 어떻게 끝나는지에 따라 시대의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 가장 평범한 옷이라고 생각했던 청바지가 알고 보면 가장 유행에 민감한 아이템인 셈이다.
2000년 10월 행사장에서 로라이즈 진을 입은 패리스 힐튼.
2000년대 초반에는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패리스 힐튼 같은 스타들이 LA 거리에서 입었던 로라이즈 부츠 컷이 거리를 휩쓸었다. 믹 재거와 보헤미언들이 즐겨 입었던 1970년대 부츠 컷이 배꼽까지 바짝 끌어올린 하이웨이스트의 나팔바지였다면, 2000년대 초반의 부츠 컷은 치골이 보일 정도로 아찔하게 내려온 로라이즈였다. 구릿빛 피부와 짧은 톱, 높은 굽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낮은 허리선의 청바지. 당시의 몸과 옷은 그렇게 세트처럼 기억에 남아 있다.
2000년대 후반에는 대망의 스키니 진 시대가 열렸다. 남녀 가리지 않고 보디라인을 극단적으로 가늘게 다듬었고, ‘헤로인 시크’로 불리는 퇴폐적이고 창백한 청춘의 얼굴이 그 시대를대표했다. 이 당시 ‘뼈말라’의 아이콘이었던 케이트 모스는 일상에서 스키니 진을 줄곧 입었고, 온 세상을 열광시켰다. 10cm가 넘는 킬 힐과 스키니 진으로 완성한 성냥개비처럼 가늘고 긴 실루엣이 패션 전반을 관통했다. 그랬던 청바지가 어느 순간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와이드 팬츠는 한순간에 찾아온 트렌드가 아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로라이즈 부츠컷 진은 2003년 당시 큰 유행이었다.
2010년대 초중반, 매일 검은 목 폴라 셔츠와 리바이스 청바지를 유니폼처럼 입었던 스티브 잡스를 필두로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세련된 것’이라는 놈코어 시대, 남성복과 여성복을 구분하지 말자며 성별의 경계를 뛰어넘은 젠더리스 트렌드를 거치면서 청바지 핏은 점차 루스해졌다.
2020년대에는 갑작스러운 팬데믹과 함께 원 마일 웨어가 일상이 되면서 신체적 매력보다 자연스러운 모습과 개인의 개성, 그리고 편안함이 중요해졌다. 몸을 드러내기보다 감싸는 쪽으로 미감이 이동했고, 그렇게 몇 년 동안 우리는 점점 더 넉넉한 청바지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디자이너들은 꾸준히 반대편을 가리켰다. 슬림한 실루엣을 런웨이에 올리고, 스키니의 귀환을 끈질기게 예고했다. 문제는 대중의 반응이었다. 패션계가 다시 좁은 바지를 가리킬 때마다 돌아온 것은 미묘한 망설임이 아니라, 꽤 단호한 거부였다. ‘스키니 진의 부활’을 다룬 온라인 게시물의 댓글 창만 봐도 그렇다. “제발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좋겠다” “이걸 왜 또 유행시키려 하는 거냐” “헐렁한 바지가 훨씬 섹시하고 멋있다”는 반응이 줄을 잇는다. “불편할 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안 좋다”며 이번 유행을 사양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디자이너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CELINE
2026 봄 여름 셀린느의 마이클 라이더가 선보인 슬림한 시가렛 진을 시작으로, 스키니의 귀환은 2026 가을 겨울 시즌에 더욱 뚜렷해졌다. 세븐 포 올 맨카인드의 니콜라 브로냐노는 케이트 모스, 시에나 밀러, 메리케이트 올슨의 오프듀티 스타일에서 영감을 받아 2000년대 중반의 미학을 노골적으로 소환했다. 폭이 좁고 긴 스카프와 당시 ‘가보시’ 구두라 불리던 높은 플랫폼 슈즈, 그리고 다리 모양이 그대로 드러나는 울트라 스키니 진을 매치하는 식이다. 발렌티노의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레이스 트리밍을 더해 스키니 진에 로맨틱 터치를 더했고, 구찌의 뎀나는 스키니 진에 퍼 트리밍 톱까지 더해 한층 대담한 Y2K 무드를 완성했다.
최근 몇 년 사이 달라진 신체에 대한 인식도 빼놓을 수 없다. 위고비와 마운자로 같은 GLP-1 계열의 약물 등장은 마른 몸을 둘러싼 풍경을 바꿔놓았다. 스키니 진의 귀환을 이 약물의 영향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날씬한 몸은 더 이상 노력과 자기관리의 결과가 아니라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옵션이 됐다. 2000년대 중반의 ‘뼈말라’ 미학이 돌아온 배경에는 이런 변화도 있다.
그렇다고 이번 시즌을 ‘스키니의 시대’라 단정하고 당장 마운자로 열풍에 동참하란 뜻은 아니다. 런웨이에 등장한 것은 스키니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리 선을 따라가되 좀 더 여유로운 시가렛 팬츠와 슬림 스트레이트까지 다양한 실루엣이 등장하는 한편, 와이드 팬츠도 여전히 건재하다. 밑단으로 갈수록 자연스럽게 좁아지는 배럴 진도 유효하다. 그저 서로 다른 핏이 한 시즌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공존하고 있다.
스키아파렐리의 배럴 진을 입고 2024 칸 영화제레 참석한 시에나 밀러.
2024년 시에나 밀러가 칸영화제에서 입었던 스키아파렐리의 배럴 핏 진은 지금 봐도 세련됐고, 스트레이트 핏에 약간의 여유를 더한 디올의 새로운 데님 팬츠는 또 얼마나 ‘쿨’한가? 한때는 부츠 컷 다음에 스키니가 오고, 스키니 다음에 와이드가 오는 식으로 하나의 핏이 다른 핏의 자리를 밀어냈다.
이제는 다르다. 서로 다른 실루엣이 각자의 취향에 따라 유행한다. 지금 청바지에는 정답이 없다. 유행이 돌아온 것이 아니라 선택지가 늘어난 것이다. 가장 새로운 유행은 특정한 핏이 아니라, 어떤 핏을 선택해도 틀리지 않았다는 자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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